나는 길에서 사진을 배웠다. 지금은 사진에서 길을 찾고 있지만 여전히 난감한 것은 조그만 프레임에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멋진 인물이 아니라 향기 나는 풍경과 삶의 흔적이 배인 인물을 담고자 했다. 이런 향기와 흔적이 있어서 자주 찾는 곳 중 하나가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모로코다.
모로코는 흔적이 많은 나라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교차와 혼합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노새를 끌고 가는 목동의 손에 스마트 폰이 들려있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극도로 절제된 마을마다 위성 TV 안테나가 빼곡하다. 유연하고 다채로운 나라다. 사진 작업을 위해 모로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다니던 중 이번에 방문한 곳은 ‘파란마을’ 쉐프샤우엔이다. 살아온 이야기가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이야기를 써가고 있는, 사람 사는 동네다.
# 눈부신 블루시티
모로코 중북부 산간도시 쉐프샤우엔(Chefchaouen). ‘모로코의 산토리니’라는 별명처럼 건물과 골목 등 온 마을이 파란색으로 칠해졌다. 이번 방문에는 쉐프샤우엔까지 대중교통 버스를 타기로 했다. 탕헤르에서 출발한 버스는 모로코 북부 시골마을과 산간지대를 지나 3시간 만에 쉐프샤우엔에 도착했다. 산간지역으로 들어설 때는 마치 한국의 대관령을 넘는 것처럼 도로의 경사가 심했다.
쉐프샤우엔(샤우엔 Chaouen: 베르베르어로 뿔) 이름은 베르베르어로 ‘뿔들을 보라’는 의미이다. 마을 뒤편에 솟은 두 개의 산봉우리 때문이다. 이 도시는 마라케시, 페스, 라밧, 카사블랑카와 같이 모로코를 대표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동화책을 펼쳐 놓은 듯 이국적인 풍경과 골목 곳곳에 놓인 아기자기한 오브제로 인해 많은 여행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 파란색 도시의 기원
6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어진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 정책에 의해 그라나다에서 쫒겨난 대규모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형적인 안달루시안 스타일(흰색을 칠한 황토 집, 작은 발코니와 타일지붕)로 건물을 지었다. 176년경 유대인들은 당시의 술탄의 명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들의 구역을 지금의 메디나 남쪽에 만들었다. 그 구역은 이슬람의 초록색과 구분 짓기 위하여 인디고로 파란색을 칠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샤우엔 블루’의 기원이다.
여기에 모로코 베르베르족 스타일의 건물이 들어섰고 처음에는 이슬람 전통색인 초록색을 주로 칠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도시 전체를 파란색으로 칠한 것은 1930년대에 건너온 유대인 이주자들이다. 박해에 대항하는 의미로 파란색을 칠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가장 싼 염료가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유대인들은 모두 이곳을 떠났고 현재는 모로코인들 뿐이다.
# 찾아가는 길
쉐프샤우엔을 방문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버스 편이다. 산간지역에 있는 도시라서 가까운 공항이나 기차역은 없다. 일반 시외버스를 이용해도 되지만 인터넷 예매를 할 수 있고 지정석이 있는 CTM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CTM 버스는 대도시마다 전용 터미널이 있어 초행길에도 이용하기에 어렵지 않다.
쉐프샤우엔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면 메디나 광장까지 걸어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 언덕길이라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직접 차를 가지고 방문한다면 국도 가까이 있는 시골 마을에 들르거나 또는 멋진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여유를 즐겨보자. 이 때 노새를 타고 일터로 가는 사람들이나 양떼를 치는 목동을 만난다면 ‘쌀람 왈라이쿰(아랍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보자.
# 느리게 걷기에 좋은 메디나(Medina: 구시가지)
하루 종일 다녀도 다 볼 수 없는 페스(fes)의 메디나와는 달리 쉐프샤우엔 메디나는 비교적 작아서 메디나 광장을 중심으로 한 두 시간만 걸어도 구석구석 볼 수가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시간이 빠듯해 미처 못 가본 골목을 찾아가 드디어 야금야금 들어 가봤다. 질레바를 입은 할아버지와 길고양이 서너 마리밖에 못 봤지만 막다른 골목은 어서 오라며 나를 반겼다. 골목 끝에서 잠시 서성이며 맛보는 그 포근함이란.
미로와 같은 작은 골목 안에 가정집은 물론이고 리아드(Ryad) 호텔, 식당, 상점들이 즐비하다. 리아드는 모로코 전통가옥을 개조한 숙소인데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모로코 식 아침식사가 포함돼있다. 3성급 호텔이나 한국의 한옥 게스트하우스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대부분 친절하고 서비스가 좋다. 메디나 바깥쪽에 현대식 호텔도 많지만 메디나 안쪽에 있는 리아드 호텔에서 숙박해보기를 추천한다.
# 식당과 기념품 가게
식당은 주로 메디나 광장 주변에 밀집해 있지만 골목 사이사이에서도 꽤 많은 식당을 볼 수 있다. 맛있는 모로코 전통음식과 서양음식을 두루 즐길 수 있으며 가격도 비싸지 않다. 노천 카페에서 따뜻하고 달달한 모로코 전통 차 에테이(박하 차)를 마시며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꼭 해볼 만한 일이다.
여행자들을 위한 기념품이나 아르간오일, 아라비아 그릇, 모로코 전통의상 질레바, 수제 가죽제품과 공방 등 수많은 가게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물건을 살 때는 가격표가 있더라도 주인과 흥정을 하는 것이 좋다.
# 일탈이 일상에게
메디나에 여행자들을 위한 상점이나 식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메디나는 주민들의 오랜 삶의 터전이다. 주민들이 이용하는 구멍가게, 문방구, 식당, 이발소 등 사람 사는 동네라면 어디든 있는 가게들도 당연히 많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아이템을 사고 파는 주민들의 삶을 한발 물러서 조용히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흥정을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는 상점주인이나 여행자의 카메라만 봐도 고개를 돌리는 아낙네들. 골목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웃고 떠드는 어린아이들과 그 공간의 원래 주인인 듯 우아하게 어슬렁거리는 길 고양이들까지. 우리가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여행자는 다른 이가 사는 동네로 아주 잠깐 들어왔을 뿐이다.
# 재래시장, 옵저버토리, 악쇼르
한국의 5일장과 비슷하게 이곳에는 대략 3일마다 재래시장이 열린다. 싱싱한 과일이나 꼬치 등의 길거리 음식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모로코 전통 모자나 가정용품을 파는 노점상도 많이 들어선다. 마을 오른쪽에 작은 다리를 건너 산으로 오르는 길이 이어지고 이 길을 따라 20분 정도 언덕을 걸어가면 예전 스페인 성당이 나오는데 여기가 쉐프샤우엔 옵저버토리다. 탁 트인 풍경과 더불어 쉐프샤우엔 마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명한 장소다.
대자연을 더 느끼고 싶다면 근거리에 위치한 악쇼르(Akchour Tourisme)를 추천한다. 쉐프샤우엔 여행사무소를 통해 당일여행을 다녀오거나 직접 운전해서 약 45분 북동쪽으로 달리면 험준한 산과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리프산맥의 비경 악쇼르를 만날 수 있다. 만약 겨울이라면 북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설경을 감상할 수 있다.
# 내 마음에 물든 동네
다음 행선지를 향해 아침 일찍 CTM 버스를 타고 쉐프샤우엔에서 나왔다. 동틀 무렵 산간지대를 내려오는 길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자욱한 안개, 그 속에서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나무, 그리고 산자락의 레이어는 한 폭의 수묵화였다.
운해에서 빠져나오면 버스는 어느덧 평지를 달린다. 차창 밖으로 아침을 맞는 시골 동네의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쉐프샤우엔에 단지 파란색만 있었다면 여행자의 동경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삶과 세월까지도 파랗게 물들이며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도 많은 여행자들은 그 파란 골목에 마음을 두고 왔을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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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현 <글·사진/ 사진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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