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이해관계 얽힌 연금개혁, 여론 휘둘려 오락가락땐 성공못해
▶ 2002년 영국 신노동당정부 개혁처럼, 당리당략 떠나 장기안목 추진해야
흔히 연금개혁은 코끼리 옮기기에 비유된다.
덩치가 아주 큰 코끼리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듯이 기금 규모가 수백조원에 달하고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연금을 개혁하는 것은 진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개혁 과정에서 총파업이나 정권퇴진 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연금개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진국에서 연금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만 해도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일자리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길어지는 인간의 수명과 함께 급속한 고령화로 공적지출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나라마다 연금제도 개혁에 나서는 이유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고령화와 저출산·저성장으로 적립금 고갈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연금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부 자문기구인 국민연금재정계산위원회는 지난 8월 국민연금제도가 현행대로 유지될 경우 오는 2057년 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보고 보험료 인상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년간 9%로 묶여 있는 보험료를 12~15%로 올리는 안이 제시됐다. 고령화로 인해 적립금 고갈시기가 빨라지는 만큼 보험료를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연금개혁을 이끌어야 할 정부가 되레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선봉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서 있다. 문 대통령은 보험료 인상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쏟아지자 느닷없이 정부 안의 재검토를 지시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기초연금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국민 반발이 큰 보험료 인상 대신 재정을 동원해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관건은 재정이다. 현재 25만~30만원인 기초연금을 40만원으로 인상하면 2088년까지 70년간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은 무려 1,416조원에 달한다.
또 하나 걱정이 되는 부분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에 연금개혁특위를 만들겠다는 부분이다. 가뜩이나 노동계에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버린 경사노위가 연금개혁을 다룰 경우 보험료 인상은 사실상 어려워 진다.
최근 논의되는 연금개혁 과정을 보노라면 참여정부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2003년 10월 참여정부는 보험료율을 9%에서 15.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60%에서 50%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반대운동이 확산되자 법 개정을 접었다.
4년 뒤인 2007년 4월에도 보험료율을 올리려 했지만 반발 때문에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퇴하는 진통 끝에 보험료는 손도 대지 못하고 소득대체율을 40%로 낮춰 ‘용돈연금’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방식으로는 연금개혁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쯤해서 2002년 영국 신노동당 정부의 연금개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는 2기 집권에 성공한 직후 노후보장 문제의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별도의 연금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에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방대하고 꼼꼼한 기초자료의 구축이었다. 위원회는 무려 4년의 시간을 들여 연금의 상황 분석과 관련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확실한 자료를 만들었다.
이 백서를 바탕으로 영국 정부는 광범위한 여론 청취와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정부는 재계와 노동계 등 이해당사자들과 수십 차례의 협의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 뒤 일반 국민들과 공적인 협의에 나섰다. 결국 국민도 연금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됐고 노후 대비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용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대중적 합의는 소극적인 세력들을 찬성 쪽으로 돌려세우고 반대파까지 설득해 개혁을 성사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이렇게 마련된 개혁안은 2010년 보수-자유민주 연립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에도 그 틀이 유지됐다.
영국의 사례는 연금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지금 우리 정부가 하는 연금개혁은 뚜렷한 밑그림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뿐이다. 전문가들이 기금 고갈을 지적하면 마지못해 보험료 인상을 추진하는 듯하다가도 국민들이 반발하면 슬그머니 물러서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은 고사하고 연금에 대한 불신만 키울 뿐이다. 연금개혁에 ‘마법의 손’은 없다. 일단 기금의 수익률을 높여 연금고갈을 최대한 늦추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보험료 인상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표에만 연연하지 말고 이제라도 고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연금개혁이 늦어지면 적립금 고갈만 그만큼 빨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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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수 서울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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