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클래식 컬럼을 쓰는 사람은 무척 심각한 성격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경우, 사실 평범하고 낭만적인 것을 사랑하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나 쇼팽, 바하가 아니라 영화 음악이나 ‘외로운 양치기’ … 혹은 유행가 따위들이다. 나만의 칵테일 바라고나할까, 믹스 뮤직의 파노라마 속으로 빠져들고 있자면 온갖 잊혀진 이야기들이 되살아나 홀로 미소짓기도 하고 음악이 들려주는 줄거리 속으로 별 의미없는 추억 여행을 떠나기도한다.
특히 이렇게 비가오는 날엔 어쩐지 빡빡머리 시절에 듣던 김추자의 ‘빗 속의 여인’이라는 유행가가 떠오르곤한다. 어딘지 관능적이라고나할까, 목소리 톤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김추자의 노래는 이처럼 칙칙한 분위기… 빗소리와 함께 들어야 제 맛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노래의 분위기가 전해주는 너절한 연애 따위… 성년의 어떤 로맨스 등에는 큰 감정의 미학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나 자신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의 감정 즉 남녀간의 그러한 장벽을 초월한 어떤 순수한 감정이 더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의 감정을 표현한 ‘소나기’같은 소설이 때론 더 섹시(?)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남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어둡고 칙칙한 요소보다는 이야기가 주는 순수함이라고나할까 어떤 건강미… 영혼의 발랄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는 새벽 6시에 문을 열어 커피를 파는 것에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커피는 여름보다는겨울… 요즘처럼 비가 후둑후둑 떨어지는 날씨에 더 잘 팔리곤 한다. 하루는 커피를 2 팟 정도 내려놓고 멍때리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빗 속에서 우비를 입은 채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먼동이 트기 이전이라 밖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마치 침입자처럼 당황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후두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자세한 인상 파악은 불가능했지만 한 눈에 보아도 어딘지 노숙자같은 어색한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언손을 커피 팟에 녹이며 커피를 따른 뒤 빨리 이곳에서 꺼지고 싶다는 듯 황망히 사라진 그녀는 그 후 몇일간 움추린 모습으로 가게에 나타났다. 무엇하는 여인일까? 손등이 부르튼 것을 보면 정상적인 직장을 가진 여인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을 슬슬피하는 눈치가 다소 기분나쁜 무언가가 있었다. 그 궁금증은 머지 않아 풀렸다. 길 건너 가로수에 가려 보지 못했는데 버스 정류장 쪽으로 모습을 나타내면서 그녀가 바로 신문팔이 아줌마라는 것을 알았다. 신문팔이라기보다는 무료로 행인들에게 신문을 나눠주는, 그러니까 미세스 가판대였던 것이었다. 그녀의 근무 시간은 지하철이 문을 여는 새벽 5시 반부터 거리의 행인이 뜸해지는 오전 11시까지였다. 그러니까 하루 중 가장 춥고 찬 바람이 몰아치는 시간에 거리를 서성대며 행인들에게 구걸하듯 신문을 건네는 것이 그녀의 직업이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불공평이랄까, 상대적인 빈곤이 느껴지곤했다. 여성에다가 혹독한 직업, 주류사회와는 거리가 먼, 영어권 여성도 아닌 것 같았다. 어디를 보나 남보다 못한 슬픈 성냥팔이 소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 들어 온 그녀가 비를 털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답답했기 때문이었는지 눌러썼던 후드를 벗어젖혔다. 치렁한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는데 머리칼과 함께 드러낸 그녀의 얼굴은 후드를 썼을 때와는 달리 단정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였다. 더욱이 씩 웃었을 때의 하얗고 반짝이는 치아는 남방의 어느 공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솔직히 미모에 약한 남성들의 순수한(?) 본능의 발로였겠지만 그녀를 대하던 나의 태도가 그 후 (약 90% 정도) 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인간이란 거지와 왕자처럼 가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존재인것 같다. 거지가 왕자인지, 왕자가 거지인지… 인간이란 치부보다는 그 이면에 감추어진, 빛나는 모습에 더욱 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물론 그것은 내 쪽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었겠지만 삶이란 가끔 아름답기 때문에 또 아프기도 한 것이었다. 그 순간은 어쩌면 절대 맞닥뜨리지 말았어야 할 신(?)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후 그녀는 거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바람이 몰고 갔는지, 나의 성냥팔이 소녀는 나에게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를 쓸 기회도 주지 않고… 고단한 삶 속… 마지막 남은 성냥께비의 환영과 함께 그녀가 나타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빗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형을 따라다니며 신문을 돌려본 적이 있었다. 막 인쇄됐을 때의 잉크 냄새…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입에 하얀 김을 뿜으며 개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던 일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신문이 사라져 가고 있는 시대, 더 이상 따끈한 신문도, 신문팔이 아줌마들도… 그 어떤 영원한 것도 없는 불확실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때 그 일을 생각할 때 마다 늘 지면을 소비하고 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아쉽고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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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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