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성경을 한글로 첫 번역 피터스 선교사
▶ 기독교 개종한 유대인의 헌신, 한국교회 성장의 초석 다져
알렉산더 피터스 선교사는 구약성경을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알렉산더 피터스 선교사를 기념하는 동판 제막예배가 지난 1일 열렸다.
절대자의 계획을 안다고 감히 나설 자가 누구인가.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선교사는 우크라이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대교 전통을 배우며 자랐다. 당연히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일본 나가사키로 흘러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난다. 이름도 자신에게 세례를 준 목사의 성을 따 피터스로 개명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미국에서 신학교를 마친 그는 다시 조선땅으로 돌아가 구약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한글을 배운지 불과 3년 만에 ‘시편 촬요’를 완성한데 이어 처음으로 구약을 한글로 번역한다.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유대인 선교사가 유대인의 언어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의 한계를 다시 한번 뛰어넘는 절묘한 작품을 남긴 것이다.
피터스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동판 제막예배가 풀러신학교 코리아센터 주관으로 지난 1일 패사디나 근처 마운틴뷰 공동묘지(Mountain View Mausoleum)에서 열렸다. 그가 소천한지 60년 만에 비로소 피터스 선교사의 헌신과 업적을 기억하는 공식적인 첫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날 예배와 기념동판 제막식에는 한인 교계는 물론 미국과 한국의 후손 및 관계자들이 모두 자리를 함께 했다.
피터스 선교사 기념사업회의 회장 박준서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7월 잡초 사이에 버려지다시피 남아 있는 무덤을 발견했다. 아르메니아어 성경을 번역한 선교사의 묘지는 기둥까지 세운 큰 묘석으로 관리되고 있는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다.
박 명예교수는 이날 예배에서 “업적에 비해 너무나 작고 초라한 무덤이 가슴 아팠고, 한국에 돌아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힘을 모았는데 다행히 남포교회가 적극 나서 후원했다”며 “동판 제막은 피터스 선교사를 기념하는 사역의 첫 걸음”이라고 밝혔다.
풀러신학교 마크 래버튼 총장도 이 자리에서 “피터스 선교사는 천재적인 언어 재능을 가졌지만 동시에 성경을 밤낮으로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한국어로 형상화했다”면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에 앞장설 만큼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박희민 목사 역시 기념사를 통해 “피터스 선교사가 은퇴 후 잊혀진 존재가 돼 오랜 세월이 흐른데 대해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피터스 선교사는 물론 박준서 목사와 남포교회에 감사를 전하며 동판 제막식을 기해 선교사님의 헌신이 재조명돼 기쁘다”고 전했다.
설교를 맡은 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는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제임스 영국왕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 구원의 은혜를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나눠 추앙받고 있다”며 “신약을 한글로 번역한 로스 선교사는 그나마 다소 알려졌지만, 무슨 연유인지 구약을 한글로 번역한 피터스 선교사는 한국 교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한글 성경 번역은 단순히 신앙 뿐 아니라 한민족의 문화와 교육을 전반에 걸쳐 향상시키는 역할을 했다”면서 “문맹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울 만큼 교육과 문화가 한민족에게 효과를 발휘한 배경에는 성경의 한글 번역이 지대하게 기여한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또 “한국교회에는 부끄러움이지만, 이번 동판 제막이 한인 성도에게 피터스 선교사에게 감사를 전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면서 “풀러신학교는 매년 피터스 선교사 기념 강좌를 개설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후손 대표로 인사를 전한 스티브 피터스 씨는 “할아버지의 사역을 조명하고 동판을 세운 한인 교계에 감사를 전한다”며 가족들을 소개했다. 또 “이곳에 참석하지 못한 친척들은 지금 스마트폰을 통해 생중계로 함께 하고 있다”며 피터스 선교사가 성경구절을 직접 써서 자신이 한살 때 물려 준 성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후원사업을 적극 후원한 한국의 남포교회 최태준 목사는 “한국인 교인들은 피터스 선교사의 충성과 헌신에 모두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면서 “그동안 잊고 있어 죄송하고 이렇게 다시 기억하게 돼 하나님과 동역한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피터스 선교사는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와 ‘주여 우리 무리를’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또 세곡교회와 내곡교회 등 10여개 교회를 개척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켐밸은 한국에 간지 얼마 안돼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피터스 선교사는 새브란스병원 의료선교사로 와 있던 에바 필드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시신은 현재 서울의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피터스 선교사는 1941년 미국으로 돌아 와 패사디나 인근 선교사 은퇴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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