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 삼학년 때이던가 우리 대학에 철학과 교수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하루에 한끼만 식사를 하신다고 해서 유명했던 분이다. 의사 말이 이러다간 당신은 몇년 못살고 죽는다고 했는데 그분이 몇 십년 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셔서 우리 동창들과 함께 금문교 공원에서 피크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의 연세가 팔십을 넘으셨는데 그때까지 멀쩡해 보였고 그런대로 건강해 보이셔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분의 강의 중에 지금도 가끔 생각나게 하는 게 있다. 인간은 여러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먹는데만 전전긍긍하며 구차하게 살아가는 층은 가장 수준이 낮은 층이고, 좀 나은 층은 항상 눈이 즐거워야 살맛이 나는데, 극단적인 예로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라고 하며 그 사랑을 잃었을 때 자살을 시도하던가 하는 층이란다. 좀더 한층 올라가면 내 영혼이 만족해야만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행복을 찾아 끝없이 헤메는 층이다라는 것이다. 요즘 현대판 집시처럼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영혼의 표류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는 변덕쟁이들이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그런데도 사랑을 할 때는 늘 영원을 맹세한다. 생각해보면 인간만큼 어리석은 동물들도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신을 찾게 된다. 이 부류는 그래도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천국에는 가 본 사람이 없다. 그 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늘 천국을 입에 달고 산다. 죽어도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라는 이 말은 상당한 위로다. 이 믿음이 없다면 아마 많은 믿는 자들이 탈락할 것이다.
사람들은 칭찬 받기를 좋아한다. 인정받으려 아등바등한다. 상 받기를 좋아한다. 예수를 믿는 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주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믿기만 하면 죄를 사함 받고, 구원 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라는 이 믿음,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믿음을 믿지 못하고 방황한다. 입과 눈만 즐겁고 행복하면 만사 오케이다. 내 주위에도 아직 이런 영혼의 표류자들이 많다. 나도 한 때는 그런 적이 있었다. 직장 때문에 텍사스로 이전을 했었다. 날씨 좋은 캘리포니아에서 몇 년을 살다가 여름엔 살인적인 더위로 맥을 못추는 텍사스로 이주를 해서 너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거의 우울증에 빠질 뻔 했다. 그때 그 더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테니스였다. 처음 빠진 운동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테니스 클럽에 들어갔고, 시간나는대로 테니스 레슨을 받아 얼마 안가서 상까지 받게 되었다. 난생 처음 운동으로 상을 타게 되어서 그날 의기양양하게 트로피를 안고 집에 돌아왔다. 남편과 아이들이 트로피를 보고 나보다 더 좋아했다. 그때의 그 순수한 기쁨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그냥 나이롱 신자였다. 어느 덥던 여름날 나는 아침에 테니스를 치고 교회 어떤 권사님의 집에서 매주 열리는 성경 공부에 참석했다. 그 권사님의 남편이 의사여서 그 집에 가면 늘 맛있는 한국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운동을 한 후에 밥을 먹고 나니 식곤증이 밀려와서 솔솔 잠이 오는데 그때 바로 성경의 한구절이 내 머릿속 아니 내 영혼의 밑바닥을 때리면서 나는 잠에서 확 깨어났다.
그 성경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이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전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는 말씀이었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아주 평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날 나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마치 전기에 데인듯 온몸이 뜨거워지고 그 말씀의 의미가 내 영혼의 바닥을 때리고 울렸을까?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나는 그날 하나님을 만났고 성령에 의해 갑자기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깨어난 것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고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바쳐야 했다. 그럼 무엇으로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까하는 의문과 함께 번개처럼 내 뇌리를 스치는 말은 글쓰기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내게 글쓰는 재능을 주셨다. 그런데 오랫동안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테니스나 골프 등으로 내 육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얼마나 아까운 시간을 소비했나.
나는 그날 너무도 말재주가 없고 재미도 하나 없는 그 권사님네 성경 공부 시간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할렐루야!
얼마 후 우리 가족은 다시 캘리포니아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차를 타고 남편이 하루종일 운전을 하는 동안 그 광활한 텍사스와 가도가도 끝없는 아리조나주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는 동안 몇며칠을 기도만 했다. 캘리포니아에 돌아오니 생각지도 않은 남편의 승진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것은 한참 동안의 시간이 흘러간 후였다. 지나간 삼십년간 나는 여섯권의 책을 냈다. 그 가운데 성경 속의 여인과 크리스챤 시집이 있다. 나는 내 영혼이 살아있는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 글을 쓰며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나무들이 울긋불긋한 단풍들로 가을은 깊게 와 있고 또 떠나려 하고 있다. 마당에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바람이 불면 그 낙엽들은 이리저리 흩어질 것이다. 마치 표류하는 영혼처럼 말이다. 내 마지막 바람은 이제는 표류하는 영혼이 아니라 안식하는 영혼으로 이 땅에 작은 거름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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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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