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떨어져 있는 큰아이 지호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그렇게 일찍 (세 시간의 시차를 고려하면, 그곳의 아침 여덟 시 경), 텍스트도 아니고 음성으로 전화를 한 일은 대학으로 떠난 후 처음이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세 명이 같이 쓰는 기숙사 방에서 이층침대의 윗침대를 쓰는 지호가, 침대에서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서 쓰러지고 발목에 금이 가 꼼짝을 할 수가 없다며 울먹였다. 그 와중에 수업에 못 가게 됐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다.
일단 교수님께 이메일로 상황을 설명해 수업엔 참석을 못 하게 되었다고 알리고, 도움을 받아서 응급실에 가서 우선 치료를 받으라고 아이를 달래주었다. 응급실에서 X레이 결과 발목에 실 같은 금이 간 것으로 판정돼, 발부터 무릎 아래까지 보조기를 하고는 다리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녀석이 부모나 다른 어른의 도움 없이 기숙사 친구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한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찌 빨리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내가 자랄 때나, 내 아이들이 자랄 때나 한 번도 이런 사고로 신체 어느 부분에 보조기를 착용한 경험이 없는 터라 걱정만 앞설 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근처 아이스링크에서 피겨스케이팅 보조교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도 못 하게 되었다. 게다가 기숙사 한 방 친구와 LA에서 하는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여름에 대학으로 떠나기도 전에 표를 사 놨었는데 그 공연이 이틀 뒤였다. 운전해서 갈만한 거리면 달려가 상태를 보겠건만, 답답한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에 답하는 지호는 태평해 보였다. 그리고는 친구와 예정한 대로 LA에 버스 타고 기차 타고 가겠노라고 했다. 상황을 볼 수 없으니, 무작정 말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토요일 공연장에 도착해서는 텍스트가 왔다. ‘OMG, 공연장에 왔는데, 엄청나게 큰 공연장에 우리가 산 표는 꼭대기에 가까워 발에 보조기와 목발을 짚고 걷는 나로선 올라갈 수가 없어요.’ “어머나, 이를 어쩌냐?”라고 곁에 있는 둘째 아이에게 속상한 마음을 나누는 사이, 지호에게서 두 번째 텍스트가 왔다. ‘공연장 안내원이 휠체어에 나를 앉히고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자리를 내주어서 우리가 산 자리보다 훨씬 더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보게 됐어요!’ 이 텍스트를 받는 순간 아이들이 자랄 때 함께 읽었던 동화책 ‘젠 단편 Zen Shorts’에 실렸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새옹지마塞翁失馬’ 이야기를 한 팬다 곰이 어린아이에게 <농부와 말>이라는 제목으로 들려주는 동화였다. 한 날 농부의 전 재산이다시피 한 말 한 마리가 어디론가 사라져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겼다. 그때 농부는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이 이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어찌 알리요?’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말이 야생말을 데리고 와, 동네 사람들은 말을 덤으로 얻었으니 경사라 축하했다. 그때도 농부는 같은 답을 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그의 아들이 야생말을 길들이려다 떨어져 발목을 다쳤고, 동네 사람들은 그를 딱히 여겼지만, 그 농부는 역시 같은 답을 했다.
다음 날, 청년들을 전쟁터로 징집하러 왔는데, 그의 아들은 발목을 다친지라 면제되었다. 서양에도 비슷한 지혜가 담긴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날 위한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넣어라!”라고 지시하였다. 세공사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지혜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왕자에게 가 자문했고, 그 왕자는 그에게 말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올 시월엔 친정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말을 잃고 몸이 마비되어 병원에 누워계신다. 인생은 끊임없는 시련이라고 했던가. 그렇지만, 니체가 말했듯 “시련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한다. (That which does not kill us, makes us stronger)”는 것을 나는 믿는다. 단풍나무의 색이 물들며 계절이 바뀌듯 이 시련 또한 지나가리라.
<
송윤정 워싱턴 문인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