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의 정수는 껍질, 강판에 살살 갈아서 즙 내고, 각종 구이에 바르면 향 깊어져
▶ 레몬을 십자로 끝 2㎝ 남겨 썰고, 꽃소금·설탕 가득 채워 병에 보관
아래 꼭지를 살짝 자른 레몬을 수직으로 세워 4조각으로 자른 뒤 소금에 절이는 게 좋다. [Modernist Cuisine. LLC.2011]
꽃소금과 설탕을 섞어 4조각으로 자른 레몬의 틈새 사이에 꽉꽉 채워 넣으면 레몬 절임이 된다. [Modernist Cuisine. LLC.2011]
루이자 메이 올콧의 소설 ‘작은 아씨들’을 주문했다. 삼십 몇 년 만이었다. 어린시절 문학, 특히 소설에 재미를 붙여준 세계문학전집 61권 가운데 한 권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어른을 위한, 두 권짜리의 국내 유일 완역본이라는 점이다. 겨울을 준비하기 전에 오래된 궁금증 하나를 해소하고 싶었다. 김장 말인가? 비슷한데 좀 다르다. 김치를 담가 먹은 지난 15년 동안 김장은 딱히 하지 않았지만 이맘때면 준비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레몬 절임이다. 그렇다, 소설에도 절인 레몬이 등장한다. 막내 에이미가 학교에서 몰래 먹다가 꾸지람을 들었던 대상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가, 책에서 처음 접하고 정말 궁금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대체 이건 무슨 음식일까? 과연 무슨 맛일까? 왜 먹었다고 혼이 나는 걸까?
알고 보니 ‘작은 아씨들’에서 등장하는 절인 레몬은 사실 라임이었다. 한국어 완역본은 물론 마침 올해 출간된 원서의 150주년 기념판에도 ‘절인 라임(picked lime)’이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자료와 정황을 좀 더 참고하면 인도의 절임 ‘처트니(Chutney)’가 서양으로 넘어 왔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왜 어린시절의 번역본에서는 레몬이었을까? 번역과정에서 라임보다는 익숙한 레몬으로 일종의 ‘현지화’가 이루어졌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단단하고 껍질 얇은 레몬 골라야
책 속의 지나친 현지화가 좀 씁쓸할 수도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어차피 레몬과 라임은 사촌 지간이니 호환이 가능하고, 아직까지는 라임보다 레몬이 더 사기 쉽고 싸며 품질도 좋기 때문이다. 다만 소금 절임은 물론 제과제빵에서도 언제나 라임이 꿩이고 레몬이 닭임을, 즉 레몬이 라임의 궁여지책이라는 점은 상기해야 한다. 라임이 조금 더 상큼하고 달콤해 열대 느낌이 난다.
어쨌든 본격적인 겨울을 위해 레몬을 절여 보자. 무엇보다 지금쯤 레몬을 절이지 않으면 늦는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찾아오면 먹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잘생긴 레몬 몇 개를 사왔다. 물론 잘생겼다고 장땡은 아니다. 과일이 대체로 그렇지만 레몬도 겉과 속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흠집 없고 잘생긴 건 기본이고, 단단하지만 껍질이 얇은 것을 골라야 레몬의 첫 번째 정수인 즙이 많이 나온다. 레몬은 의외로 흔해서 동네 마트에서도 살 수 있고 품질도 대체로 고른 편인데, 종종 갈라보면 부실한 경우가 있다. 박치기 공룡의 두개골처럼 껍데기는 아주 두껍고 과육의 알갱이는 제대로 여물지 않은 쭉정이처럼 부슬부슬 떨어지고 즙이 빈약하다.
설사 이런 ‘레몬 같은 레몬’을 골랐다고 하더라도 절반은 안심해도 좋으니 그게 바로 레몬의 진정한 미덕이다. 레몬의 두 번째이자 어쩌면 정수 가운데서도 정수인 껍질을 오롯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껍질에는 여러 켜가 있으니 조금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의 몫도 조금은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섬세함은 강판이 책임진다. 생강이나 마늘 등을 가는 바로 그 강판 말이다. 레몬을 한 손에 가볍게 쥐어 들고 다른 손으로 강판을 가볍게, 과실의 곡면을 따라 움직인다. 보푸라기처럼 사뿐한 겉껍질(zest)이 갈려 나올 것이다.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그에 맞춰 미세한 액체의 방울이 튀는 것도 볼 수 있다. 껍질이 레몬의 정수를 품도록 도와주는 기름이다.
레몬 한 개당 한 줌 안팎으로 나오는 이 겉껍질로 풍성한 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대체로 파운드케이크나 커드 같은 제과제빵에 두루두루 쓰지만 통닭 구이 같은 짠맛 위주의 음식에도 안 어울릴 수가 없다. 껍질은 갈아내 소금, 후추와 버무려 닭의 겉면에 바르고, 나머지 레몬은 뱃속에 채워 넣어 오븐에 구우면 레몬의 향이 촘촘하게 배인 닭고기를 즐길 수 있다. 한식이라면 즙과 더불어 무생채에 쓴다. 양조식초의 타는 듯한 신맛보다 부드러운 즙에 무와 잘 어울리는 레몬 겉껍질의 향이 가세하면 섬세하면서도 표정이 훨씬 뚜렷한 반찬으로 생선구이 등에 아주 잘 어울린다.
레몬의 정수 껍질에 묻은 왁스 벗기려면 다만 껍질을 갈아낼 때 주의를 좀 기울여야 한다. 조금만 무리하면 두껍고도 쓴 속껍질(pith)까지 갈아내 버리기 때문이다. 섬세함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절제가 더 관건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만 더 벗겨내어 보자…’는 마음으로 박박 갈아내다가 쓴맛까지 갈려 나오기 일쑤다. 아, 그리고 껍질을 갈아내고 종내 먹으려면 일단 잘 씻기부터 해야 한다. 사실은 이게 현재 유통되는 레몬을 향한 불신의 핵심이다. 장기보존을 위해 표면이 왁스로 코팅되어 있다. 그래서 노랗고도 반들반들한 나머지 때로 식재료가 아닌 것 같은 인상마저 풍긴다. 그러니 세척법을 살펴보자. 레몬을 체에 받치고 뜨거운 물을 끓여 붓는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헹군 뒤 종이 행주로 물기를 잘 닦아 낸다. 왁스 녹이기가 관건이니 전자레인지에 10~20초 돌린 뒤 헹구고 닦아 내도 좋다.
왁스를 말끔히 벗겨낸 레몬 네 개를 도마에 올리고 아래 쪽의 꼭지를 칼로 썰어 낸다. 이제 레몬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수직으로 세워 칼로 꼭지부터 썰되, 2㎝쯤 남긴다. 완전히 썰어 분리하지 않고, 벌려도 조각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여유를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꽃소금 250g, 설탕 130g을 공기에 담아 잘 섞고 레몬을 벌려 최대한 많이 채워 넣어 병에 하나씩 담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클 혹은 김치와 같은 요령으로, 최대한 공간을 남기지 않고 꽉꽉 눌러 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닫고 매직으로 스카치테이프 등에 날짜를 써 붙여 냉장고에 보관한다. 여유를 부려도 30분이면 절이고 정리정돈까지 끝낼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레시피에 따라 레몬즙이나 물을 채우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레몬이 알아서 앞가림을 한다. 시간이 지나며 즙이 배어 나오고 저절로 맛이 든다는 말이다. 그렇게 4주 지나면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상태에 접어 들고, 3, 4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익는다. 껍질 및 과육이 반투명해질 것이니, 이후부터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 먹으면 된다. 많은 양의 소금에 절였으니 적어도 1년은 보관이 가능하고, 레시피에 따라 ‘기한에 제한이 없다’고도 말하니 어쨌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레몬 절임은 삼치회와 먹는 게 제격 이렇게 김장만큼이나 중요한 겨울나기 준비가 간단히 끝났다. 알아서 맛이 드는 절인 레몬의 진가는 해산물에서 가장 빛난다. 방어, 광어, 연어, 참치, 오징어 등 웬만한 생선회에 짭짤하고 새콤한 방점을 찍어 준다. 먹을 때는 병에서 꺼내 칼집을 넣은 ¼쪽을 쭉 당겨 떼어낸 뒤 껍질과 과육을 분리한다. 소금에 오래 절여 도구가 필요 없을 만큼 과육이 물렀지만 껍질만큼은 아직 힘이 남아 있으니 칼이나 푸드 프로세서 등의 도구로 잘게 다져 생선회에 얹거나 양념장에 섞어 먹으면 맛있다. 두루두루 곁들여 먹어 본 결과 숙성 삼치회와 가장 잘 어울린다. 한두 조각 얹어 입에 넣으면 숙성된 삼치살이 사르르 녹으면서 물릴 때쯤 가느다란 줄기로 퍼져 나가는 레몬의 향과 짠맛, 신맛을 즐길 수 있다. 한편 따뜻한 음식에는 모로코풍의 양고기 스튜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로, 일종의 정석처럼 통한다. 다진 껍질 반 작은 술 정도면 샐러드 드레싱 (비니그렛)이나 마요네즈, 심지어는 초고추장의 맛을 북돋는데도 제 몫을 톡톡히 한다. 레몬 몇 개만 절여도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이 사뭇 여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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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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