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할 때에야 많은 것을 버리게 되듯 신문사에서도 데스크를 옮길 때 수많은 책과 자료들을 버리게 된다. 30여년 기자생활 동안 수차례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엄청난 양의 종이더미를 버렸는데 그 오랜 시간을 견디며 지금까지 나를 따라온 카탈로그 한 권이 있다. 1988년에 나온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 연감이다.
당시 황하진 회장(1999년 작고)이 정성껏 만든 이 연감은 그제까지의 미협 역사를 정리한 첫 기록인 한편 내가 처음 문화부 기자가 되어 열심히 뛰던 시절의 자취가 담긴 센티멘탈 밸류를 가진 책이다. 고 황하진 선생은 마치 미협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성실하고 진지하게 많은 일을 하셨는데, 연감을 펼치면 그 분과 보조를 맞추어 신명나게 뛰던 30년전의 내 모습이 오버랩 되곤 한다.
그 미협이 지금 LA한국문화원에서 제 50회 정기회원전을 열고 있다. ‘50회’라는 숫자는 미주한인사회에서 아직은 들어보기 쉽지 않은 숫자다. 그것도 협회전이 50번째라는 이야기고, 미협의 창립연도는 1964년이니 54년 된 단체다. LA 한인회의 전신인 재미한인거류민회가 창립된 것이 1968년이고 보면 한인회보다 역사가 길고, 지금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한국문화원보다는 2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단체다.
남가주한인음악가협회 역시 1964년에 창립됐으나 최근 10여년간 활동이 크게 위축돼있고, 미주한국문인협회가 1982년, 미주한국무용협회는 1983년에 창립됐으니 미협은 남가주한인사회에서 단절 없이 기능해온 가장 오래된 문화예술단체라 할 수 있다. 50년 넘는 세월동안 불협화음이나 분열 없이 화가들을 대표해왔다는 것, 한해도 거르지 않고 회원전을 열어 서로의 작업을 격려하며 친목을 이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축하를 보낼 만하다.
이민사회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이 단체를 세우고 꾸준히 운영한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생업 때문에 전공이 취미처럼 돼버린 사람이 많고, 각박한 현실에서는 단체보다 개인이 앞서기 쉽기 때문이다. 수십년전 이런 단체들을 만든 선배 예술인들은 이민 초기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 너나없이 역경 가운데 창작열을 꽃피웠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응집력이 더 강했고, 개인을 넘어 단체가 더 순수하고 소중했을지도 모른다.
화가들 중에 작품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과거 많은 화가들은 그림 복제공장이나 만화영화 스튜디오 같은 곳에서 일하며 작업했고, 지금도 미술학원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튜디오 한켠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음악가들도 마찬가지다. 유학 와서 명문 음대를 졸업했어도 음악만 연주해서는 먹고 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 교회 성가대의 반주자나 지휘자, 독창자로 채용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다수는 학생 레슨을 하거나 아니면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음악은 취미로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문학인들의 사정은 더 나쁘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발표 지면과 독자층은 극히 제한돼있고, 책을 출간해도 팔리지 않으니 메아리 없는 외침을 숙명처럼 안고 글을 쓰는 이들이다.
지난 금요일 미협 50회 전시장에 들렀다. 특별 기획을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두꺼운 도록 연감도 만들었고, 회원 68명의 출품작을 모두 같은 사이즈(24x24인치)로 제한하여 일사불란하게 벽에 걸었으며, 원로화가들의 작품은 따로 우대한 디스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미협전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협회전은 참가에 의의를 두기 때문에 매년 중구난방이고 성의 없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처음으로 회원 모두가 새 작품을 만들어 내놓은 것이다.
미셸 오 회장은 “반세기 넘게 미협을 지켜온 선배들의 노고와 열정을 생각하면서 회원들에게 수없이 강조하고 부탁하여 만든 전시”라고 소개하고 한인사회의 따뜻한 격려를 기대했다.
많은 예술인과 단체들이 오늘도 공연을 하고, 전시를 열고, 책을 만든다. 작가들은 이민사회의 역사, 우리의 꿈과 애환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만의 잔치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포용과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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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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