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남긴 은행 통장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람은 형제가 여럿 있는데 본인은 끝에서 둘째였다고 한다. 큰 누나와는 20살 이상 차이가 났다. 그래서 팔순이 넘으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은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그래도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아버님에게 용돈을 드릴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께 드리는 용돈은 대학 교수인 형 둘, 그리고 미국에 유학 가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남동생과 함께 남자 형제 넷이 매달 모아서 드렸다고 했다.
그런데 지방에 사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유산을 정리하던 중에 아버지의 은행 통장을 하나 발견했다. 그런데 은행구좌 비밀번호가 오리무중이었다. 아버지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고 어디에다 적어 놓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은행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유산 상속자 모두 함께 찾아오지 않으면 알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유산 상속 대상자인 자녀들이 모두 8명이나 되고, 국내 거주 자녀들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아예 한 명은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함께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보자 은행 지점장이 넌지시 아마 돌아가신 분이 비밀번호를 어려운 것으로 사용하진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아마 자녀의 생일이나 어쩌면 누구의 차 번호 같은 것을 사용했을 수도 있으니 시도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시도하다가 자신의 차 번호를 기입했더니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은행 통장에 남은 돈의 액수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잔액은 35만원에 불과 했다. 그 때가 지금부터 20여년 전이었지만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 현재 가치로 환산하더라도 100만원이 안되는 액수였다. 은행 담당자는 액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이미 알았기에 8명의 자녀들이 모두 함께 찾아와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았고, 비밀번호를 쉽게 알아 낼 수 있도록 힌트를 제공했었던 것이었다.
사실 통장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이 사람의 아버지가 자식들이 준 용돈을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저축해 상당한 액수가 되었다는 얘기인가 보다 하고 잔뜩 그 액수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35만 원 밖에 안 되었다는 말에 묘한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만약에 그 35만원을 찾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아들이 귀국했어야 했다면 통장 잔액 확인 후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는 물음도 찾아 들었다. 은행 담당자의 힌트 제공이 현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사람이 찾아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그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써 준 차용증서였다. 아버지가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차용증서 날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로부터 얼마 오래 전이 아니었다. 그리고 액수는 50만원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4명이 모아서 드린 용돈이 부족해서 돈을 빌렸던 것이었다. 물론 자녀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말이다. 그 빌린 돈을 언제 갚으려고 계획했는지는 몰라도 통장에 남아 있는 돈으로는 부족했으니 아마도 다음 용돈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갚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나의 지인은 그 차용증을 보고 울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용돈이 부족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자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용돈의 많고 적음이나 추가로 돈이 필요함을 말씀 안 하신 채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다 쓰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큰 불효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를 듣는 나에게도 팔순이 넘은 나의 아버지에 대해 나는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사나 하는 죄책감이 찾아 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 달에 몇 번 정도 식사를 같이 하는 게 전부이니 말이다. 그리고 만나면 이미 전에 수 없이 들었던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도 않지 않는가. 살아 계실 때 잘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못 따랐는데 그 후회가 반복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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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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