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
어렸을 적에 신라의 혜초 스님이 열여섯 어린 나이에 당나라를 거쳐 뱃길로 인도의 다섯 나라를 여행하고 쓴 왕오천축국전, 그 사실 하나 만으로 가보고 싶었던 실크 로드. 그는 인도를 거쳐 페르시아까지 걸어갔다가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어서 천산산맥의 남쪽 서역 땅을 걸어서, 실크 로드를 타박타박 걸어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와 왕오천축국전을 썼으리라 추측한다.
그의 나이 20-24세. 두루마리에 한문으로 쓴 여행기가 왜 돈황의 석굴 17번 안의 장경고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의 이번 여행에서도 풀지 못했지만 혜초가 돈황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돈황 바로 옆 안서에 머문 기록은 왕오천축국전에 있다. 그 먼 길을 청년 스님은 어찌 걸어 다녔는지. 구도자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지만 그는 비범한 스님이며 시인이며 여행자이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서안
내가 가까운 친지들을 모아 아홉 명이 혜초라는 여행사를 통해 9월 8일 인천 발 중국 서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정오에 도착, 중식 후 진시황 병마용으로 갔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서안, 똑같은 병마용이지만 관광객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거의 모두 중국인이다.
처음 보았던 병마용의 감동은 없었지만 여전히 기원전 사라진 진시황제의 병사들은 지금도 살아있듯 경이롭다. 다른 갱에서는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우리들은 복원 작업장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다음 서안 중심가에 위치한 회족마을을 보았다. 이미 당대에 이슬람 서역사람들이 서안에 까지 와 장사를 하고 그들만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으니 실크 로드는 벌써 2000년 전, 3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이슬람 문화는 양고기, 빵모자, 모방하기 어려운 문자로 대표된다. 서안은 그 시대의 국제적인 도시였다.
이튿날 아침에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120 km 떨어진 화인 시 근처의 화산으로 갔다. 중국의 5대 명산으로 꼽히는 화산은 연꽃 모양의 봉우리를 갖고 있어서 ‘꽃산’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작은 셔틀 버스에서 내려 삭도 정거장으로 가서 삭도로 정상 부근에 내려 약 150미터를 등반하고 내려왔다. 서쪽 봉우리가 2,155 미터이니 백두산보다는 낮다.
한국의 고전문학에도 자주 나오는 중국의 화산, 산동 반도의 태산만큼이나 한국인에게 알려진 산이다. 저녁에는 샤브샤브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나누다. 옆에 삼성전자의 직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마천루의 도시, 거기 삼성전자가 들어가 있다. 시진핑의 고향이니 정치적 투자도 고려한 셈이다. 부디 성공하기 바란다.
가욕관
이튿날 아침 고속열차로 북상, 난주에 도착. 점심식사 후 유가협 댐으로 이동, 황하상류 병풍처럼 펼쳐진 황하석림을 바라보며 협곡의 병령사 석굴을 찾아갔다. 석림은 돌의 숲이란 뜻이다. 바위산 병풍이란 말. 깨끗한 물이 아니라 황토색 강물이 아래로 흘러 그리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지만 눈여겨볼만하다. 중국문명이 황하에서 시작했다고 하니 바로 이 근처, 아닐까 상상한다.
1000개의 불상이 크고 작은 석굴 속에 있었는데 여기도 서양도둑들이 들어서 벽면의 그려진 불상과 석굴 가운데 세워진 석상을 파내가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북위시대 누워있는 불상, 열반에 든 석가모니 상이 거기 있었다.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온 것이다. 3세기 작품이다. 절벽위에 병영사가 있다.
이튿날 아침, 고속열차로 다음 목적지. 가욕관, 만리장성의 서쪽 끝. 명나라 주원장이 새로 건축한 이후 흉노족이나 돌궐족 침범이 없었다니 견고한 성을 쌓아올린 것이다. 여기도 중국인 관광객이 인산인해. 모택동의 서예작품, 가욕관 한시, 한편이 입구 돌 위에 새겨져 있다. 중원을 지키기 위한 중국의 몸부림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육로로 돈황을 향해 북서로 달렸다. 어둠이 어느새 깊어지고 있었다. 돈황, 실크 로드의 정수는 돈황이다. 거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되었다 불란서로 실려 갔으니 내게 돈황은 혜초의 8세기 여행기가 간직되었던 처소다. 17번 막고굴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돈황
돈황, 오아시스 풍경은 미국의 애리조나 사막이나 뉴멕시코 사막 오아시스와 근사하다. 한줄기 개울이 흐르고 백양나무, 버드나무가 물가에 모여살고 그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공기를 정화한다. 거기 석굴을 파고 살았던 인디언들의 주거지와 근사하다.
인간의 지혜는 공통의 분모. 중국 3대 석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유네스코 문화유적에 등재된 인류의 유산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돈황 박물관에 들러 영화를 보고나서 우리들은 박물관 버스로 막고굴로 이동했다. 20분 후 오아시스에 도착, 흙벽에 벌집처럼 구멍이 난 막고굴 앞에 섰다. 어디나 인산인해. 모든 석굴이 열려있지 않았지만 17번 석굴은 열려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장서를 넣어두었다는 장경고가 있다. 일종의 서고. 지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고굴 박물관에 들어와서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한 쪽이 사진으로 벽면에 걸려있다.
앞 뒤 글이 사라진 여행기의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다른 온전한 복사판은 어디서 나올까?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아쉽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동서를 잇는 여행기. 그 이전에 나온 유명한 당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가 있지만.
오아시스마다 막고굴이 있다. 오아시스마다 부처님에게 안전한 여행과 성공적인 장사를 위한 기도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벌집마다 부처님 그림이 있고, 스님이 한분씩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모래폭풍이 언제 사막의 길을 잃게 할지 모르는 데 부처님에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모래폭풍은 대상과 낙타의 뼈만 남기고 사라졌다.
사막의 강도들이 언제나 목숨과 돈을 빼앗고 달아날 수 있는 위험지대. 그럼에도 대박을 기대하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까? 지나간 2000년, 3000년 사막 길은 가장 위험한 장삿길이었고 가장 이익이 나는 무역로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들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었을까? 흉노족이든 돌궐족이든 북방의 유목민들은 겨울이 오면 말달려 사막을 건너 오아시스를 정벌하고 서안까지 침공, 약탈하고 달아났다. 한 무제가 50년 전쟁에서 흉노족을 초토화하고 평화시대를 가져왔지만 한나라 번영은 그때부터 사라지고 다시 흉노족이 서역을 지배하는 강자로 나타나고 있었으니 장삿길은 바로 전쟁의 길이었을 것이다. 강하면 지배하고 약하면 지배당하는 전쟁의 역사가 바로 사막 길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명사산과 월아천
오후에는 낙타타고 명사산을 반쯤 오르다 그 옆에 월아천 방문. 돈황은 석굴의 불교미술과 사막의 모래바람이 만든 모래산, 모래산과 모래 산 사이에 수천만 년 그대로 있는 그믐달 모양의 호수가 가장 미학적이고 신비한 풍경. 고비사막의 낙타는 이집트 낙타처럼 키가 크지 않아서 당나귀 같다. 소처럼 끝없이 새김질하고 있는 초식동물, 사막동물인지라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누워 있다가 사람이 타면 뒷발을 먼저 세우고 앞발을 일으킨다. 몸이 앞으로 쏠리다 뒤로 쏠리면서 균형을 찾게 한다. 낙타 몰이꾼이 앞에 서서 천천히 걷는다. 45분 낙타 등에 업혀 사막을 지나다.
낙타에서 내려 명사산을 바라보면 오른쪽에 5층 팔각정이 보이고 그 아래로 호수가 나온다. 월아천. 한 눈에 신비의 호수를 알아볼 수 있다. 모래폭풍은 그 호수에 모래를 떨어트리지 않고 두개의 산에 떨어트린다. 사람이 만든 팔각정도 모래폭풍이 어디서 싣고 와 내려놓은 듯 보인다. 그래서 돈황은 실크 로드의 신비.
야간열차
야간열차로 투르판으로 떠났다. 야간열차는 완행, 밤 11시30분. 시골 역에서 기차에 오르니 작은 칸에 침대가 아래 둘, 2층에 둘이 있다. 2층에 오르는 사다리도 없다. 철봉체조 하듯 날라야 한다.
아침 8시가 넘어서 투르판 가까운 시골 역에 우리들 일행을 내려놓는다. 나이 먹은 여행자들이 잠자다 화장실에 들르는 불편함이 이 여행의 가장 고통스러운 대목. 돈이 더 들더라도 하룻밤을 돈황 호텔에서 재우고 이튿날 아침 고속열차로 올라가게 했어야 옳다.
투루판
여기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천산산맥이 신장을 가로 질러 동서로 펼쳐져 있다. 천산은 언제나 어디서나 흰 눈으로 상징되고 있다. 어디서나 보이는 눈 쌓인 정상. 눈이 녹아내려 포도, 멜론, 수박 석류농사가 가능한데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포도, 멜론은 최고의 단맛을 낸다고 한다.
사막은 돈황에서 만난 모래사막이 아니라 달나라 표면 같다. 검은 땅, 황무지. 가끔 야생의 풀 한포기가 살아있다. 애리조나, 뉴멕시코 선인장은 안 보인다. 유전지대, 석탄지대이니 중국이 놓칠 수 없다. 신장은 흉노족의 땅이다. 그래서 검문검색이 심하다. 신장 독립운동 하는 이슬람 원주민들의 뜻을 중국정부는 잘 알고 있다. 티벳도 마찬가지.
신장엔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마지막 지명들이 모여 있다. 그가 쿠차에 도착한 때는 727년 11월 상순으로 적고 있다. 그의 여행기에 날자가 명기된 곳은 여기뿐이다. 여기서 그는 돈황 옆 안서로 가서, 연기를 거쳐서 장안으로 간다. 그가 방문한 도시국가와 도시국가 사이에 100리, 1000리라고 적고 있다.
혜초가 장안으로 내려올 때 이 서역 땅은 당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고 후일 751년 서역을 지배한 사령관이 고구려 유민의 아들 고선지 장군, 그는 서역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가웠다.
서유기의 무대 고창왕국
당의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기 전 머물렀던 고창왕국도 여기 있다. 서유기의 무대가 바로 이 서역 땅. 투루판을 한자로 토로번이라고 쓴다. 따라서 투루판에도 천불동 석굴이 있다. 그러나 그 석굴도 도굴당해 남아있는 것은 없고 복원사업을 하겠지만 얼마나 성공하겠는가? 여기 어느 석굴에 혜초 스님이 머물다 갔는지 모른다.
그 석굴 아래 오아시스 눈 녹은 물이 개울로 흘러가고 버드나무가 서있고 그늘이 있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조각으로 만들어 놓아 여기가 서유기의 배경이구나, 알게 해준다. 투루판에서 가장 오래 남을 기억은 고창왕국의 성터를 찾고 당나라 시대 공동묘지 미라를 보고 나온 것이다. 현장법사가 설법을 했다는 사원의 터에서 기념사진을 찍었고 관광객을 위해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와 사진 한 장을 찍은 것이다. 악기는 우리나라의 전통 현악기 같았다. 비단길이 그 시대 한반도까지 문화와 악기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으리라. 당나라 시대엔 이 서역 땅에도 불교가 성행했다. 중국의 연고권을 위해 중국은 고창왕국을 신장의 간판으로 내놓고 중국에 동화하지 않는 위구르 인은 미국 인디언처럼 퇴락하고 말 것이다.
저녁식탁에는 위구르 족 의식으로 어린 양이 구워져 나왔고 그 의식을 위해 춤추는 젊은 여자와 남자가 나와 춤을 추면서, 우리보고 동참하라고 해서 함께 춤을 추웠다. 처음 양고기를 먹었던 식탁도 오래 잊기 어려울 것이다.
이튿날 우리들은 차편으로 우루무치를 향해 북상했다. 신장자치구의 수도다.
우루무치
우루무치의 거리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며 번잡했다. 도로를 넓히든가, 자동차 수를 줄이든가 해야 할 도시. 전자가 합당하겠지.
박물관에 가면 한 눈에 이 도시와 신장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곳보다 천산산맥 정상에 있는 호수, 천산호수가 인상적이다. 백두산 천지와 비슷하나 조금 작은 수면, 그리고 언제나 호수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유람을 즐길 수 있다. 백두산 천지는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천지이고 여기 호수는 호수에서 설산을 올려다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다. 천산산맥 북쪽으로는 초윈이고 아래로는 거친 황무지, 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이튿날 남산목장이라는 카자크 부족의 텐트 마을을 방문했다. 문화탐방 시간이었다. 유목민마을은 천막촌이다. 몽고나 여기 크게 다르지 않다. 양탄자가 안의 벽을 이루고, 바닥을 이루고 있다.
우리 일행은 거기서 양고기 꼬치를 사서 먹었지만 한 가족의 텐트 안에서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착하게 생긴 부인이 손님대접으로 과자와 우유를 내놓았고 14세 중학생 딸이 민속춤을 추웠다. 여자도 말 타기 경주에 나간다니 모두 기마병으로 출전할 수 있는 듯하다.
우루무치 전통시장에 가면 여자들의 스카프가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고 나는 흑구기자차를 한 병 기념으로 사왔다. 저녁엔 발 마사지를 받으며 새벽 1시 반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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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최연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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