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5월22일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지금부터 136년 전의 일이다. 1889년에는 공사관을 매입해서 16년간 쓰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제 매각되었던 걸 2012년 문화재청이 재매입해서 6년간 복원공사를 마치고 지난 5월22일에 재개관하였다.
‘1891년 10월23일 조선의 귀족 한명이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벨츠빌에서 열차사고로 사망하였다.’ 당시 미국의 3대 일간지가 크게 보도한 내용이다. 그의 이름은 변수(邊遂), 직업은 연방농무부 정직을 앞둔 임시직 공무원이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자였다. 이 사고 소식이 대한제국 공사관에 통보되었으나 ‘아는 바 없슴’ 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의 시신은 미국인 친구가족들에 의해서 친구가족묘에 안장된다. 2002년, 죽은 지 111년 만에 이 무덤의 존재가 한인사회에 최초로 알려진다. 필자가 늘 지나던 길목에 그의 무덤이 있었다.
지금부터 6년 전인 2012년 11월2일 메릴랜드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는 비록 소수의 관계자들만 모인 가운데 의미 깊은 ‘유물전달식’이 있었다. 한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 ‘변수 선생’의 졸업장이 그것이었다. 그의 문중 후손의 노력으로 120년 만에 모교인 메릴랜드 대학으로 되돌아 왔다. 이는 해당 대학 전체를 통 털어서도 가장 오래된 졸업장이다. 그의 메릴랜드 농과대학 졸업은 1891년이고, 그해에 그가 죽었다. 최초 미주한인 이민역사를 1903년으로 보니까 그보다 거의 20여년을 빠르게 미국에 건너 온 그가 어떤 역정을 거쳤을까, 그와 비견되는 근대인물중 김옥균에 비해 10살이 아래 이고, 서재필 보다 3세, 이승만에 비해서는 14세가 위다. 그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은 근대한국 인물역사는 물론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전체 한인 커뮤니티의 정체성과도 연관이 지대하다.
일단, 그의 소사(小史)를 살펴보자. 1861년 당시 역관 집안의 자제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는 전후로 조선은 격변을 겪는다. 미국은 그에게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1883년 보빙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미국의 주요도시를 시찰한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후 광활한 영토를 바탕으로 급속도로 국력이 팽창하고 있어서 본격적으로 세계의 중심국가로 자리 잡고 있는 중이었다. 유럽까지 둘러 본 그는 후진 조국의 미래에 대한 남다른 ‘숙고와 도전’을 가슴에 품고 귀국한다.
그의 귀국과 맞물려 조선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에 의지하고, 그 반동으로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나지만 이때는 일본을 끌어들인다. 저물어가는 쇠락왕조 주변에서 엘리트 그룹들은 우왕좌왕했고 왕실의 부패와 맞물려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서구문물을 일찍이 접했고, 언어에 능통했던 그가 격랑의 한가운데 서게 되는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다. 그는 약관에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혁명의 대열에 서고, 혁명의 실패로 인하여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1년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만 의하면 그 동양유학생을 위해 메릴랜드대학은 캠퍼스의 가장 요지에 그의 이름으로 ‘변수룸’을 만들고 그의 대형 사진을 걸어 놓았으며, 언제 세웠는지 조차 모르게 가장 번화한 캠퍼스타운 네거리에 그의 사진과 함께 길 팻말을 세워 기리고 있다. 아주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요즈음 같으면 나라에서 국비로 유학을 보냈을 법도 한데 밝혔다시피 피신하는 와중에도 고국의 경제 부흥을 꿈꾸고 매진했던 그의 흔적은 현재까지의 밝혀진 자료만으로도 그 규명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수식어는 빙산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제국주의 침탈과정, 그가 이루려던 조국의 산업혁명, 그의 학창과 미 주류사회로의 진출 등 그 숱한 과제와 사명이 나이 30세에 만리타향에서 객사(?)함으로써 국가적으로 그 손실이 너무나 컸다.
과정보다는 결과중심의 그릇된 근·현대 한국역사교육 때문에 꼭 뭔가를 이루고, 남겼어야 평가하는 조급증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그는 정통 양반출신이 아니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마든지 해석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그는 개화파 중에서도 중도보다는 개혁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선택과 운명에서 교훈적 요소가 지대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후 3년 뒤에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된다. 성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엊그제 관계자 몇분 들과 그의 사고에 대해서 보존 현장만 무심하게 보고 되돌아 왔다. 당시 재미 한국인이라고 하는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하던 시절에 대한제국공사관은 왜 그를 외면했을까? 앞으로 지면이 주어진다면 좀 더 진행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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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 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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