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논산에서 대전으로 통학한 국민학교 동창생이 있었다. 그의 시골집에서 논산역 까지 10리가 훨씬 넘었고, 대전역에서 대전고등학교까지도 거의 한 시간을 뛰어야 했다. KTX가 없던 그 시절엔 논산에서 대전까지 완행열차로 4시간 넘게 걸렸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절반을 통학 길에 쏟아 부은 그 친구는 결국 견뎌내지 못하고 고향으로 전학했다.
당시 나는 대전 시내 집에서 학교까지 20분쯤 걷는 거리가 멀다고 투덜댔다. 대학시절에도 걸어서 30분이 채 안 되는 통학길이 까마득했고, 한국일보 입사 후 시내버스(104번)로 40여분 걸린 통근시간이 몹시 지루했다. 지난 20년간도 로컬 길로 10분 내에 출퇴근할 수 있는 쇼어라인에서 살아왔지만 더 가까운 아파트를 찾아 잠시 옮겼다가 되돌아왔다.
되돌아보면 나는 참으로 행운아다. 요즘 한국 직장인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갖고 있고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도 옛날보다 크게 좋아졌지만 출퇴근 소요시간은 하루 평균 1시간 41분이나 된다. 서울시 거주 직장인들은 평균 2시간 15분이나 됐다. 이용하는 교통편은 지하철(28%), 자가용(26%), 버스(21%) 순이었고, 도보 통근자는 4%도 채 안됐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편도 통근시간 90분 이상, 운전거리 50마일 이상 직장인들을 일컫는 ‘수퍼 통근자(super commuters)’가 60여 만명을 헤아린다. 코네티컷 주에 살면서 뉴욕 직장에 2시간 걸려 통근하는 젊은이의 얘기를 며칠 전 신문에서 봤다. LA의 내 오랜 여성 동료도 주 5일간 매일 120마일 남짓 운전해 20여 년간 통근한 후 최근 은퇴했다.
최신(2017년) 센서스 통계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들의 통근시간은 평균 26.9분이다. 한 해전의 26.6분보다 약 18초 늘어났다. 뉴욕 지역 직장인들의 통근시간이 평균 37분으로 가장 길었다. 10년 전보다 ‘고작’ 2분 늘어났지만 주 5일, 연간 50주 통근할 경우 늘어난 시간을 모두 합산하면 10년 전보다 연간 16시간 이상을 길에서 더 허비하는 셈이다.
워싱턴 DC가 평균 34.9분으로 10년 전보다 연간 12시간 반이 늘어나 2위에 올랐고 그 뒤를 샌프란시스코(34.4분), 샌버나디노(남가주, 32.7분), 애틀랜타(32.3분), 시카고(31.8분), 볼티모어(31.5분), 보스턴(31.4분), 시애틀(31분), LA(30.8분) 순으로 10위까지 이어졌다. 교통체증이 세계최악 상황인 LA의 평균 출퇴근시간이 시애틀보다 짧은 것은 뜻밖이다.
이들 10개 광역도시 중 8개가 샌프란시스코, 뉴욕, LA 등 소위 3대 ‘수퍼 시티’ 주변에 포진해 있으며 수퍼 통근자와 ‘메가 통근자’(출퇴근에 2시간 이상 소요)들도 역시 대부분 이들 도시에 밀집해 있다. 고임금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가구당 연소득이 평균 100만 달러 이상인 전국의 우편구역(zip code) 중 약 80%가 이들 3대 수퍼 시티에 몰려 있다.
장거리(장시간) 운전 통근에는 스트레스가 따르기 마련이다. 미국 예방의학 학회보는 하루 통근 운전거리가 편도 10마일 이상인 사람들은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늘어나고 혈압도 일시적으로 높아지며 우울증을 유발할 위험성이 높아진다고 보고했다. 또한 심장기능과 삶의 만족도가 저하되며 불면증과 척추통증을 앓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LA의 수퍼 통근자 동료는 장거리 운전이 몸에 배어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통근시간을 줄이려고 직장 근처로 이사하거나 집 근처 회사로 전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가장 빨리 늘어나는 부류의 직장인들은 통근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 곧 재택근무자들이다.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주 4일 근무를 자원해 통근일수를 줄이는 사람들도 많다.
퇴근시간에 비해 출근시간이 더 따분한 건 일하러 간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모른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별로 즐거울 게 없다.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는 운전이 오히려 즐겁다. 트래픽도 대체로 없다.
고교시절 하루의 절반을 통학하는 데 쏟은 동창 녀석의 모티브도 향학열이었을 터이다. 지금 만나면 자기가 한국 메가 커뮤터의 원조라며 큰소리 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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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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