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는 물의 땅이다. 일만 개도 넘는 호수들이 푸른 보석처럼 빛나고, 호수를 꿰는 목걸이처럼 미시시피강이 울창한 숲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대지. 40여년 전, 이 풍요의 땅에서 처음 유학 봇짐을 풀었다.
후덕한 인심, 자원과 물량이 넘쳐나는 세계 최고 부국의 실체를 경이롭게 바라보던 그 시절. 나는 가난했지만 밤늦도록 실험실에서 꿈을 키웠고, 큰 아들을 낳았으며, 고물차를 몰고 감격했었다.
“비단강이 비단강임을/ 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얼마전 나태주시인의 “비단강”이란 시를 읽으며 마음의 고향인 그 곳과 소중한 분들을 생각했다. 특히 우리 가족을 육친처럼 도와주신 은인, 젊은 날 추억을 공유했던 J 선생님의 근황을 듣고는 더 지체없이 찾아 뵙기로 했다.
J 선생님은 당시 우리보다 근 20년 연상의 만학도셨다. 병원행정학을 전공하셨는데 100여명 유학생그룹의 좌장이셨다. 인품이 후하시고 영어회화 실력도 탁월하셨던 선생님은 자주 학생들을 초대, 즐거운 추억을 만드셨다. 외로웠던 우리들은 주말마다 선생님 부부의 초대를 목을 빼고 기다렸다. 사모님의 음식 솜씨 또한 일품이셔서 라면을 먹어도 성찬이었다.
새내기들은 아파트 임대부터 운전면허까지 선생님 도움을 받지않은 이들이 거의 없었다. 특히 어려운 학생들의 인생 상담도 해주시며 큰 형님처럼 살펴 주셨다. 연말에 호수 휴양지로 선두에 선 선생님 차를 따라 열 대도 넘는 차들이 카라반을 이루며 달려가던 기억이 선하다. 외유내강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보여주신 큰 멘토셨다.
선생님은 졸업 후 대학부설 병원장으로, 교회의 어른으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도우셨다. 우리는 미네소타를 떠난 후에도 연락드리고, 가끔 찾아뵜지만 이젠 80중반이 되셔서 요양원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항상 청년처럼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동적이시던 어른께 이태 전부터 파킨슨병이 찾아왔다. 초기치매증세도 겹쳐 옛 기억은 생생한데 최근 일들은 자주 혼동하신다고 했다.
사모님께 우리 비행기가 오후께나 도착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은 아침부터 문밖에서 휠체어를 타고 기다리셨다. 우리 내외를 보자 옛날처럼 어린아이같이 웃으시며 포옹하려 안간힘을 쓰신다.
“선생님 영어가 국보급이셨어요.” 내가 옛 추억을 꺼냈다. 선생님은 실눈을 뜨고 말하셨다. “6.25 동란 직후, 소년가장이 되어 리어카를 끌며 채소 장사를 했어요. 그 때 삼위일체 영어 교본을 달달 외웠지오. 공부에 굶주렸던 내게 영어가 얼마나 달던지..” 선생님은 아직도 영어 성경과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꼼꼼히 읽는다고 하셨다.
“이 늙은이를 찾아주는 옛 친구들이 고마워요. 더구나 40년지기는 김선생 뿐이요. 돌아보면 난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 주위에 좋은 분들이 참 많았어.”
얼마전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조사했다고 한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사람들 곁으로 가라”는 게 결론이었다. 내가 행복했던 것은 J 선생님같이 행복한 분을 만났음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으려 했소. 그런데 지나고 보니 착오였소. 결국 서로 좋아했던 사람들만 남았소. 구태여 맞지않는 사람들과 끝까지 맞추려 애썼던 게 교만이었던 것 같아. 인생은 서로 맞는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기도 짧은 것 같아요.”
선생님을 휠체어에 모시고 미시시피 강변으로 나갔다. 옛날 우리가 드라이브하던 길이었다. ‘아이태스카’라는 작은 옹달샘에서 발원한 미시시피강은 트윈 시티 근처에 와서는 폭넓은 장강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몸이 아픈 날, 눈을 감으면 내 맘 속에 강이 흘러가요. 그 강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로, 내가 은혜 입은 사람들과의 추억의 배가 떠가요. 수십년 지났어도 생생한 아름다운 기억들이 물결 따라 흘러요. 그 때 아, 행복하다. 나도 강물 따라 흘러 가야지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떠난 훗날에도 또 누군가 서로 은혜를 나눈 사람들이 강변에 서서 아름다운 추억을 비단강에 띄우리라. 은혜의 강가에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리라.
<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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