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성인 10명 중 1명 이상 우울감을 경험…청년층 심각
▶ 미취업 상태일 때 일할 때보다 5배 이상 높아…치료는 OECD 최저수준
“우울증은 병, 환자 마음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주변 도움은 우울증 치료의 첫걸음…각종
[AP=연합뉴스]
"나는 우울증 환자다. 예전부터 예민한 성격인 데다, 대학 입학 후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더 심해졌다. 그러나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뿐이었으니까. '네가 맘이 약해서 그래'. 숨기는 게 최선이었던 이유다."
스무 살부터 약 10년 동안 우울증을 앓고 있는 배 모(29) 씨의 말이다. 배 씨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했다.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치료만 받으면 완치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편견을 내려놓고 우울증 환자를 바라봐 달라"고 호소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오늘은 내 마음이 먼저입니다'….
최근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이다.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를 다뤘다.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통해 우울증을 털어놓거나 상담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우울증 경험을 고백한 연예인도 보인다. 매년 성인 10명 중 1명 이상은 우울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병원 문을 두드리는 이는 일부다. 흔한 질병이지만 치료에 소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 성인 100명 중 5명, 주요우울장애 겪어
지난달 24일 점심시간에 찾은 광화문역 주변의 한 정신의학클리닉센터는 상담을 기다리는 이들로 북적였다. 대기실에는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다. 병원 관계자는 "예전보다 우울증을 이유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늘었다"면서도 "'기록에 안 남느냐' '병원 가면 다른 사람들과 안 마주칠 수 있느냐'고 묻는 전화도 많이 걸려온다"고 말했다. 우울증 치료에 나서는 이도 많아졌지만, 주변 시선을 이유로 망설이는 이도 늘었다는 뜻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국가 정신건강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만 19세 이상 성인 중 우울감을 경험한 비율은 13%로 나타났다. 이전 조사인 2013년 비해 약 3%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우울감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높았다. 9.5%를 기록한 남성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많은 16.5%다.
성인 100명 중 5명은 살면서 한 번이라도 주요우울장애를 겪는다. 주요우울장애란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생각 등이 2주 이상 지속하고, 사회적·직업적으로 장애를 일으키는 증상을 말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6년 주요우울장애 평생 유병률은 5%로 나타났다. 여성은 6.9%, 남성은 3%다.
◇ 취업난에, 좌절감에…우울한 청춘들
김 모(35) 씨는 2011년 우울증을 앓았다. 당시 음대 입시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고, 생활고까지 닥쳤던 게 원인이었다. 김 씨는 "낮에는 입시 공부를 했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했다"며 "현실도 암울한데 불합격 통보를 수차례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무력감에 휩싸이더라"고 말했다.
20~30대 청년의 우울증은 심각하다. 2016 정신질환 실태조사에 따르면 주요우울장애 발병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30대 초반이다. 17.3%로 전 연령대에서 유일하게 15%를 넘겼다. 20대도 10%에 육박했다.
노규식 연세대 세브란스 정신건강병원 청소년센터 소장은 "최근 들어 젊은층에서 우울증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취업난으로 인한 극심한 경쟁, 사회 초년생 시절 겪는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노 소장은 "취업에 실패한 청년 상담자 중 '노력만으로 안 된다'며 무력함을 호소하는 이가 느는 것을 체감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한 정신질환실태조사에 따르면 미취업 상태일 때 우울증은 3.7%로, 일하고 있을 때보다 5배 이상 높았다.
보건복지부 측은 "20대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취업난, 주택난, 낮은 혼인율 등 그 세대가 겪는 어려움이 반영된 셈"이라며 "젊은 세대를 위한 각종 정책과 함께 우울증 치료서비스의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 우울하지만 병원은 찾지 않아
우리나라의 우울감은 다른 나라보다 높은 편이다. 통계청이 2015년 말 발표한 한국사회동향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2011년 7~8월) 우울감 경험이 있었다고 밝힌 비율은 13.2%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스위스(4.0%), 네덜란드(6.9%), 덴마크(7.8%), 미국(9.0%), 일본(9.3%) 등 OECD에 속한 대부분 국가가 우리보다 많게는 3배 이상 낮다. OECD 평균치(10.7%)와 비교했을 때도 2.5%포인트 높다.
반면에 치료받는 비율은 현저히 낮다. 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정신의료서비스 이용률(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 장애 등 모든 정신질환의 총합)은 15.3%에 불과하다. 미국(39.2), 뉴질랜드(38.9%) 등에 견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일일 항우울제 소비량은 1천명 당 19.9DDD로 OECD 평균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가장 많이 소비하는 축에 속하는 아이슬란드(135.9)나 호주(106.7), 영국(100.1)의 15~20% 수준에 불과하다. 국민 1인당 의약품 판매액이 OECD 평균을 훨씬 상회하고, 항생제 소비량은 최상위권을 기록한 것과는 정반대다.
실제로 2016년 정신건강 현황조사에 따르면 우울 문제로 상담을 의뢰한 이들 중 치료서비스로 연계된 비율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울 증세를 호소한 아동·청소년(19세 이하) 2만3천여명 중 실제 치료서비스를 받은 인원은 1천863명으로 7.85%다. 성인(20~64세) 역시 7만2천여명이 같은 증상으로 상담을 의뢰했으나 치료를 받은 것은 3.37%에 해당하는 3천400여명뿐이다. 우울 증세를 겪는 노인(65세 이상)은 9만명이 넘지만, 단 3%만이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가까운 사이라…더 털어놓기 힘들어요
우울증을 겪었던 A(35) 씨는 병세를 처음 가족에게 털어놨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별거 아니라는 의견과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그는 "힘들게 고백했는데 '괜찮아 보이는데…'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이내 입을 닫았다"고 말했다.
기선완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을 주변에 털어놓았다가 '네가 맘이 약해서 그래' '누구는 안 힘드냐' 등 부정적인 반응만 얻고 되레 위축되는 경향이 허다하다"면서도 "우울증은 병이다. 환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기 교수는 "이것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리 정신의료 서비스 이용률이 크게 낮은 이유"라고 덧붙였다.
우울증 환자가 병원 문턱을 넘기 힘든 건 싸늘한 주변의 시선 탓이 크다. 보건복지부가 우울증 등 기분 장애를 겪은 이들을 대상으로 정신의료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를 조사한 결과, 30.5%(복수응답)가 '치료 사실을 타인이 알까 걱정돼서'라고 답했다. 또한, 주변 편견이나 잘못된 정보 등으로 인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라고 답한 이도 75.9%나 됐다.
그러나 우울증 치료의 첫걸음도 주변의 도움이다. 노규식 소장은 "우울증 환자 주변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인이 우울증을 털어놓았다면 '이런 얘기 해줘서 고마워' '그동안 고생했어'라고 얘기하며 치료를 받도록 권유하는 게 좋다. 노 소장은 "환자 입장에서는 내 가까운 사람이 인정해줬다는 사실만으로 용기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까지 우울증을 앓았던 배 모 씨도 "병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악화시키는 일"이라며 "부모님이든 친구든, 애인이든 도움을 꼭 받아라. 내 얘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증세 호전에 도움을 준다"고 조언했다.
이해국 가톨릭대 의정부 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의 가장 무서운 점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이나 동료 등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라며 "가령 부인이 우울하면 자녀나 남편도 함께 우울해진다"고 말했다.
환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선완 교수는 "외국의 경우, 우울증 치료에 대한 접근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며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려는 캠페인이나 계도 활동도 쉽게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기록이 남는다, 돈이 많이 든다 등의 편견 탓에 정신과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며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주문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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