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은 투신자살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을 추모하려는 시민들의 발길로 장사진을 이뤘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도 수 만명의 조문객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고 한다. 몰염치 한 정치 현실 속에서 정치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처럼 뜨거운 애도가 쏟아지는 것은 흔치않은 광경이다.
물질의 이치를 물리(物理), 마음의 이치를 심리(心理), 일의 이치를 사리(事理)라 한다. 사람다운 행실의 이치를 윤리(倫理)라고 하며 생각과 말의 이치를 논리(論理)라 일컫는다. 말 같지 않은 말, 생각 같지 않은 생각의 평가는 윤리 도덕적인 관점에서 내려지기도 하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내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하여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은 쉽게 도덕적 논리적 이치를 무너뜨린다. 뇌물은 인간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고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칸트에 의하면 판단은 지각(오감)으로 부터 오는데 “지성과 감성이 뒤섞인 결과”라 말하고 있다. 노회찬의 투신은 지성보다 감성의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다.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이성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감성적이다. 현실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뇌물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정치인은 말해서 무엇 하랴.
특검의 본질은 드루킹 일당이 작년 대선을 앞두고 인터넷 포탈에 여론을 조작했느냐 이며 문재인 정부의 호위병들이 연결되어 공모했느냐가 핵심 이슈이다. 그런데 정녕 불을 지펴보니 엉뚱한 곳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흐지부지 덮어 보자는 비열한 잔꾀가 은닉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누가 봐도 본질을 호도하는 물타기 구린내가 스멀스멀 진동한다.
노회찬의 비극은 드루킹 일당의 협박도 특검의 표적 수사와 물타기도 아니다. 그를 극단적인 투신의 길로 몰고 간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치명적인 도덕적 내부 손상에서 나온 자책에서 비롯됐다. 정치자금 불법 수수 의혹이 불거지고 물론 법리 다툼은 있지만 구체적 혐의 증거가 나왔는데도 “한 푼도 받은 적 없다”며 줄곧 부인해 왔다. 더 나아가 원내 대표로서 드루킹 특검법안을 적극 반대한 모습까지 보이기까지 했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는 정치판에 정의의 투사로 싸움판에 뛰어들었어도 시간이 흐르면 악당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져 버린다. 착한 사람은 있어도 착한 정치인은 그래서 없다.
한국 정치의 현실 속에서 노회찬을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한계를 못 벗어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덕을 만지작거리면 인간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도덕은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하는 자유의지 영역이 아니다.
자신에게 씌워진 불법 정치자금의 굴레에서 얼마나 몸부림치며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했는지 당을 향한 유서에서 이렇게 참회하고 있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라고 죽음으로 답하고 있다. 정치인 노회찬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품성과 인격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정작 여의도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들은 가득 한데…
벤담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추구하고 손해가 되는 것은 회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기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이익을 회피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칸트는 대표적인 이성주의 철학자인데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 인격이라고 그는 정의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길들여져 왔다. 명예, 도덕, 수치심 등은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나의 욕구를 재단하게 하는 도구들이다.
이들은 삶을 질서 지우고 풍요롭게 해주는 듯 보이지만, 필요 없는 열등감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나의 삶을 억누르고 왜곡하며 비굴하게 만들기도 한다. 루소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사회의 가치규범들이 진정 사회와 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성으로 욕망을 부추기는 감정을 통제하고 입장과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최적화 상태를 찾는 것이 중용의 덕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용이라고 했다. 그에게 중용의 미덕 이 있었다면 진정 의미있는 삶을 버리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애절함이 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대중화에 삶을 바친 노회찬 의원의 영면과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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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국 정치 철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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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50점도않되니 매우 아쉅죠.
100%맘에드는건 아니지만 90점넘는정치인이 떠나니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