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식 전 합참작전본부장
현재까지 결과로 보면 북핵 협상의 승자는 단연 김정은이다. 완전한 비핵화의 대상이 북한이 아닌 한반도라는 것을 공식화해 미국의 핵우산과 한미동맹을 해체할 명분과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챙겼다. 김정은도 놀랐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을 통하지 않고 처음부터 미국과 바로 접촉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큰 성과는 김정은의 대내 리더십이 확고해진 점일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남북한 최고지도자가 세계 최강국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어떤 상반된 대우를 받았는지 생생히 지켜봤다. 핵 없는 부자나라 한국은 정상회담 수행기자가 폭행당하고 대통령의 발언을 통역하지도 못하게 하는 푸대접을 받았다.
가난하지만 핵이 있는 북한은 최상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온갖 고난을 이기고 핵을 개발한 것이 얼마나 현명했는가. 3대에 걸쳐 백두혈통을 지도자로 모신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이제 완성된 핵 무력을 바탕으로 경제개발에 집중하면 한국처럼 잘사는 것은 물론이고 한때 불가능해 보였던 남조선 해방까지 이룰 수 있다’고 확고하게 믿을 것이다.
우리 사회도 또 다른 믿음에 들떠 있다. 북한이 완전한 핵 폐기는 물론 재래식 군사력까지 대폭 줄여 경제개발에 우선할 것이기 때문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김정은이 했다는 “북한의 모든 무기는 남측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 걸까. 아니면 믿고 싶은 걸까. 믿음이 마음속에만 머무를 때는 그래도 괜찮다. 확인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행동으로 옮길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특히 안보태세를 낙관적 기대로 성급하게 약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경고도 ‘안보팔이’라고 비난한다. 이 분위기가 계속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연합훈련 중단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주한미군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한미동맹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이를 시정하려는 우리 정부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한미동맹이 튼튼하다는 말뿐이다. 연합훈련이 중단되면 우리의 단독훈련이라도 강화하는 것이 상식인데 태극연습·을지연습 등이 오히려 취소됐다.
그런데 국민 대부분은 별로 걱정하지 않고 무덤덤하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반전이다. 북한의 평화 마술이 뛰어나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지쳐서 기초적인 상식도 생각하기 싫은 걸까.
이것뿐이 아니다. 비무장지대(DMZ)로부터 10여㎞ 이내 남쪽에 있는 군부대시설 신축공사를 잠정 보류한다고 알려졌다. 국방부는 “남북관계가 급격히 개선됐고 군축이 진전돼 최전방부대의 후방 배치가 이뤄지면 군사시설 철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부전선은 그래도 공간이 있지만 서부전선은 심각하다. 판문점에서 평양까지는 215㎞이나 서울까지는 불과 62㎞다. 같은 면적으로 부대를 철수하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더구나 우리 지역은 DMZ에서 10㎞ 되는 최전선지역을 제외하면 급격한 개발로 대다수 방어시설이 아파트와 도로로 바뀐 지 오래다. 파주·일산 신도시 전방에 부대와 방어시설이 없어지고 아파트단지가 유사시 최전방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전방에서 철수한 부대들은 갈 곳이나 있을까.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로 군사력 건설에 소홀하면 안 된다. 국방개혁은 병력은 줄이되 최신 첨단무기를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안보전문가들의 우려대로 병력과 첨단무기 도입까지 동시에 줄여 복지예산으로 전환하는 것은 절대금물이다. 인권에 기초한 선진 병영문화는 당연히 필요하나 지휘계통과 전투태세를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예를 들면 병사들의 평일 외출 때문에 유사시 즉각 전투력 발휘가 곤란해져서는 안 된다.
북한 비핵화와 군사적 위협 감소가 시작되기도 전에 한미동맹과 우리 자체의 군사대비가 흔들리고 있다. 마지막 생명줄인 최전방 방어태세마저 너무 쉽게 다뤄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이 1년만 더 평화공세를 벌이면 우리 스스로 모든 무장을 해제할 수도 있다. 평화와 협상도 힘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와 상식이 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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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식 전 합참작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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