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정치사의 격랑을 한동안 휘저었던 ‘운전’ 김종필 씨가 지난 6월 23일 타계했다.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가 중구난방이다. 그가 공인이었던 이상 다시한번 냉철한 눈으로 회고해 보자.
김종필은 62년 중령시절 육사 8기 동기생들과 ‘하극상’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처삼촌 박정희 당시 육군소장과 치밀하게 쿠데타를 계획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하극상 내용은 군부 장성급 이상 상관들의 전횡과 부패를 비판하고 장면 정권의 무능과 사회혼란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군인 신분으로 절대 있어서는 안될 집단항명으로 적지 않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마침내 쿠데타에 성공한 김종필은 권력장악 배후인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부장으로 취임한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쿠데타 명분은 ‘민족적 민주주의’였지만 실천 내용은 전혀 딴판으로 흘러갔다. 북한 침략, 공산주의 침투 방어를 명분으로 창설했다는 중앙정보부는 먼저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군 수뇌부 숙청을 단행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의 국민탄압 불법사례는 필설로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김종필은 한일협정 체결을 주도했다.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매에 대한 보상금을 받아 경제개발 자금으로 사용하며 일본과 협력하여 북한 침략을 공동 방해한다 등이 골자였지만 그 내용에 의혹이 너무 많았다. 당시 일본 오히라 외상과 김종필의 소위 ‘김-오히라 메모’ 사건은 부실한 내용에 의혹이 많아 국민들이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김-오히라 메모에 국민들이 분노한 이유는 우선 평화선(해양주권선, 일명 이승만 라인)을 포기한 것이다.
‘평화선’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최고 외교업적으로 꼽힌다. 평화선은 이승만이 우리 해양자원을 보호하고 북한침투와 일본의 영향력을 방어하자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국민들은 김종필이 평화선을 일본에 매각했다며 크게 분노했다. 평화선은 1965년 박정희 공화당 정부가 공식 폐기해버렸다.
“제 2의 이완용이 돼도 좋다”고 폭언을 내뱉은 김종필은 “그까짓 바위 덩어리 2개를 놓고 양국 간에 말썽 부릴 일이 뭐 있습니까 그냥 폭파해 버립시다”라고 했다는 내용이 오히라와의 비밀 메모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그가 추진한 한일협정 내용에는 재일교포 법적지위, 참정권 문제, 위안부 문제 등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보상금 액수도 형편없었고 그나마 절반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횡령했다는 설 등이 나돌아 전국 대학생 반대시위 6.3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김종필은 계속되는 박정희의 견제에 시달렸다. 한일회담 체결 직후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건립 부정, 새나라 자동차 사건, 재일교포 김태중의 빠찡꼬 사건) 등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의 길에 오르기도 했다.
김종필은 사사건건 박정희를 배반했다. 3선 개헌, 유신선포 큰 대목에 이르러서 늘 반대했다가 다시 돌아서는 이율배반적인 처신으로 눈 밖에 났다. 그는 늘 암암리에 자기 세력 구축에 몰두하는 등 야욕을 보이기도 했다. 엄청난 축재, 부패분자로 지목돼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대뜸 그를 구속시킨 이후 오랫동안 가택연금 시켰다.
김종필은 정치적 야욕을 위해 타락도 서슴치 않았다. YS, DJ와 함께 정치 9단 JP로 불리던 그는 이른바 ‘핫바지론’으로 충청지역 감정을 선동하여 영호남 대립에 지쳐버린 많은 국민들을 실망케 했다. 그는 내각제에 동의하지 않는 김영삼과의 충돌로 3당 합당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처마 끝에 연작(참새)이 높은 하늘을 나는 홍학의 뜻을 어찌 알리요”라는 타협 아닌 아첨을 던진 후 김대중 대통령과 손을 잡고 총리에 취임했다.
김종필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꼭 제 에미(육영수)의 못된 점만 닮은 얼간이”라고 한 적이 있고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그 바보 같은 XX 뭘 보고 지지하겠느냐”고 감정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노무현의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에 대해 “역사는 누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정치행로나 족적에 대해 앞에 자신의 말처럼 과찬도 비판도 말고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그의 빈소를 찾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은 그에게 공직자가 아닌 일반 국민에게 주는 무궁화 훈장을 수여했다.
김종필은 음악 애호가이자 수준급에 이르는 화가이기도 했다. 대단한 독서량과 현란한 말솜씨로 한때 감수성 많은 젊은층의 인기를 모으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행각에는 얼룩점이 너무 많고 정치업적은 기억할 만한 게 거의 없다. 정치는 ‘허업’이라던 종언 속에서 뭔가 못 다 채운 그의 한이 읽혀짐이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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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자유광장 회장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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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하수인 김종필을 정확하게 보셨고 용기에 찬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