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LA에서 똘똘한 이민자 청년을 만났다. 빈민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이 대다수인 할리웃고교 2학년에 편입했지만 이듬해 하버드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정동수씨다. 대학졸업 후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생소했던 유권자 등록운동을 시작했고, 1.5~2세 동료들과 함께 한인 정치단체인 한미연합회(KAC)를 창설했다. 한국일보가 이들의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정씨는 곧 이어 변호사가 됐고, 캘리포니아주 하원선거에 출마했으며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상무부 부차관보를 역임해 주위로부터 “역시 하버드가 인재를 제대로 알아봤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정씨가 이민 1년 만에 하버드대에 합격한 건, 성적도 성적이지만, 인종 등 다른 요소들을 감안하는 소위 ‘어퍼머티브 액션(소수계 차별철폐 정책)’ 덕이 컸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발동한 행정명령(10925)에서 비롯됐다. 정부 유관기관들이 직원을 채용할 때 인종·종교·피부색·국적 등의 차별 없이 ‘긍정적 조치(Affirmative Action)’를 취하라는 내용이다. 전통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계층을 ‘잘 봐주라’는 취지의 이 행정명령은 그 후 특히 명문대학 입학사정에서 논란의 불씨가 됐다.
대학들이 캠퍼스의 인종다양화를 위해 성적이 좀 떨어지는 유색인종 지망자들을 합격시키자 기득권층인 백인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자고로 명문대학들은 좋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해온 백인 부유층 자녀들의 전유물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자렛 쿠쉬너도 부모가 낸 거액의 기부금 덕분에 하버드에 합격했다. 그의 고교 교사들도 예상밖이라고 했다.
유색인종에 밀려 대학에 떨어졌다는 백인학생들의 소송이 연방 대법원까지 잇달았다. 2003년의 볼린저-미시간대학 케이스, 2009년의 애비게일-텍사스대학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연방대법원은 그때마다 어퍼머티브 액션을 이행한 대학당국 손을 들어줬다. 지난 2016년 피셔-텍사스대학 케이스에서도 대법원은 5-4의 표결로 원고 피셔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그동안 흑인과 히스패닉은 물론 한인 등 아시안 중에도 정동수씨 같은 어퍼머티브 액션의 수혜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아시안 학생이 어언간 어퍼머티브 액션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며 최근 보스턴 연방법원에 하버드대학을 제소했다. 아시안 지망자들에게 불법적으로 쿼타를 적용해 합격자 수를 자의적으로 줄였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소송을 낸 ‘공정입학 추진 학생들(SFA)’은 합격확률이 25%인 아시안 지망생이 백인, 히스패닉, 흑인이라고 가정하면 확률이 각각 35%, 75%, 95%까지 늘어난다고 강조했다. SAF는 하버드가 1920~30년대 유대인에 매긴 쿼타를 이제 아시안들에 적용하고 있다며 성적만을 바탕으로 신입생을 뽑으면 아시안 지망생이 절반 이상을 점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5일 트럼프 행정부가 어퍼머티브 액션에 ‘어퍼컷 펀치’를 날려 논란이 일고 있다. 취임 후 선임자 정책들을 모조리 뒤엎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오바마 행정부가 내렸던 어퍼머티브 액션의 7가지 시행지침을 중단시켰다. 자신의 지지기반인 백인 중산층 입맛대로 이제는 ‘인종근거(race-based)’에서 ‘인종무시(color-blind)’로 정책을 전환하겠다는 의미다.
트럼프 행정부 발표는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의 지난주 은퇴발표와 맥을 같이 한다. 케네디는 보수-진보가 4-4로 팽팽한 대법원에서 낙태허용 등 민감한 사안마다 결정표를 던져 연방대법원에 ‘케네디 대법원’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위에서 말한 2016년의 어퍼머티브 액션 케이스에서도 케네디 대법관이 진보 쪽으로 돌아 5-4의 원고패소 결정을 내렸다.
보스턴 연방법원은 SFA와 하버드대학 간의 재판을 오는 10월 열 예정이지만 결국 대법원까지 갈 공산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 대법관의 후임을 보수진영에서 지명할 터이므로 SFA가 부동표 위협 없이 5-4로 승소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꼭 즐겁지만은 않다. 오랜 동지였던 흑인과 히스패닉들로부터 백인 못지않은 적대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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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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