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에 분교 둔 요리학교, 30·40대 직장인 수강생 늘어
▶ 조리사 자격증 있어도, 칼쥐는 법부터 배울 만큼, 교칙 엄하고 수업료 비싸
김태홍씨가 자신의 이름을 딴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음식점 셰프 김태홍에서 포르토 소스를 곁들인 채끝 스테이크(들고 있는 것), 사과를 곁들인 정어리 리예트(맨 앞), 보타르가 콜드 파스타를 선보이고 있다. <고영권 기자>
최지혜씨가 나카무라 아카데미 재학 시절 만든 일본 가정식 요리.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농어회, 농어구이, 새우 튀김, 대합 맑은 국. <최지혜씨 제공>
서울 금호동에서 원테이블 레스토랑 ‘아이언 레이크’를 운영하는 최지혜(35)씨의 약력은 다소 특이하다.카이스트에서 IT경영학으로 학사를, 서울대에서 기술경영학으로 석사를 딴 그는 대형 건설회사에 입사해 5년간 일했다. 꽃, 운동, 전통주 등 워낙 여기저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그다음 눈을 돌린 건 요리다. 최씨는 회사를 다니면서 일본 요리학교 나카무라 아카데미 한국 분교에서 초급, 상급 과정을 수료했다. 수업료는 입학금 50만원을 합쳐 1년에 약 1,780만원. 1년 반 동안 매주 주말, 인천에서 서울 논현동까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오간 이유는 요리사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최씨는 그저 “회사 생활의 탈출구였다”고 했다.
가슴 속에 사표를 품 듯
최씨가 요리에 ‘한눈을 팔기’ 시작한 건 직장생활 4, 5년 차에 접어들면서다. 업무가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삶과 일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제 대부분의 시간이 회사에 묶여 있잖아요.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은 억지로 만들지 않으면 갖기가 어렵더라고요.” 그와 함께 수업을 들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식당을 열기보다는 일단 뭔가 배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요리를 통해 다른 꿈을 꾸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본격적으로 진로를 바꾸려는 것이 아닌, 직장이 채워주지 못하는 빈 곳을 요리를 통해 해소하는 사람들이다.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식당 개업을 준비했던 윗세대와 달리 이들은 젊을 때 일찌감치, 그것도 요리학원이 아닌 요리학교에서 제대로 배운다. 평생 조직 생활에 매일 생각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가슴 속에 사표를 품 듯 요리 실력을 갖춰놓는 것이다.
매일유업에서 일하던 김태홍(33)씨가 르꼬르동블루 숙명에 들어간 이유는 “인생이 지루하게 흘러갈까 봐”서다. 그의 눈에 회사 선배들이 결혼을 하고 회사에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은 안정적으로만 비치진 않았다. “(인생이) 정체되는 것처럼 보였어요. 저도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새로운 걸 시도하기가 더 어려워질 테고 그럼 삶이 너무 지루해질 것 같더라고요. 큰 맘 먹고 요리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한눈팔기’라기엔 이들이 치르는 대가는 상당하다. 국내에 분교를 둔 외국의 유명 요리학교는 나카무라 아카데미 외에도 프랑스 요리를 가르치는 르꼬르동블루 숙명, 이탈리아 요리를 배울 수 있는 일꾸오꼬 알마가 있다. 대학보다 비싼 수업료는 물론이고 규칙도 엄하기로 유명하다. 기존에 조리사 자격증을 딴 이들도 이곳에서 칼 쥐는 법, 밥 짓는 법부터 전부 새로 배운다.
르꼬르동블루의 경우 요리 디플로마(수료증)를 따기 위해선 기초, 초급, 중급, 상급 4개 코스를 총 1년간 들어야 한다. 수업료는 3,190만원. 수업에 15분 이상 늦으면 결석 처리되고, 4번 이상 지각하면 낙제다. 일꾸오꼬 알마는 시험을 치러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으며 6개월 수업료가 850만원이다. 나카무라 아카데미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지는 수업 시간 동안 실습실 내에선 물도 마실 수 없다. 2번 이상 결석하거나 시험에서 떨어지면 코스를 통과할 수 없는 건 물론이다.
나카무라 아카데미에 따르면 현재 수강생 중 약 70%는 30, 40대다. 손혜련 홍보실장은 “(나카무라 아카데미는) 학비가 비싸다 보니 어린 학생들보다는 (돈을) 벌어서 오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전공도 직업도 요리와 무관하지만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요. 일본에 ‘심야식당’ 같은 영화도 있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 마음에 심야식당이 하나씩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마음에 심야식당 하나쯤
조직의 미래를 회의하며 요리라는 딴 주머니를 찬 이들 중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이들이 많다. 대기업의 뛰어난 복리후생은 물론이고 전문직의 안정성도 이들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서울 송파구 오금로에서 카페 오코티디앙을 운영하는 이윤정(32)씨는 원래 회계사였다. 그에게 음식이란 “부모님이 해주시는 것”이었지만 결혼 뒤 직접 음식을 하면서 요리에 흠뻑 빠졌다. “일이 바쁘고 힘든데도 밤에 다음날 먹을 반찬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너무 재미있어서요. 회사를 다니면서 체계적으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르꼬르동블루에 들어갔어요.” 입학 직전 그는 회사를 그만뒀다. 도저히 둘을 병행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주변에서 걱정 많이 했죠. 하지만 이미 저는 좋아하는 게 확실해졌으니까 후회는 없었어요.”
김태홍씨도 2016년 초 서초구 반포동에 자기 이름을 건 원테이블 레스토랑 셰프 김태홍을 열었다. 그는 퇴사를 결심한 후부터 한 달 간, 사표를 말 그대로 품고 다녔다. “결정하기 정말 쉽지 않았어요. 생활비, 카드값 모든 게 부담이었죠. 일부러 변화나 퇴사에 대한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었어요.”
미디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3,4년 전부터 불어온 ‘먹방(먹는 방송)’ ‘쿡방(요리 방송)’ 열풍이 꺼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요리는 조직에 뿌리 내릴 생각이 없는 이들의 총아로 떠올랐다. 르꼬르동블루의 홍보를 맡은 전은지 매니저는 “처음부터 요리사를 꿈꾸고 오는 젊 은 학생들과 본업을 가진 채 세컨드 잡을 생각하며 오는 사람의 비율이 반반 정도”라며 “미디어를 통해 셰프라는 직업이 전문직으로 부각되다 보니 직장인들도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보다 정체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것 또한 이들의 공통점이다. 최지혜씨는 요리를 “탈출구이자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회사에서 역할이 커질수록 10년 뒤 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과연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란 고민이 들면서 이것저것 자꾸 배우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에 따르면 요리는 대기업을 버리고 찾은 최종 정착지가 아니라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수많은 과정 중 하나다. “제 경험상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해 있으면 계속 기회가 오고 또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이게 하나로 엮이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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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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