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프러스 사이 넘실대는 올리브 물결, 르네상스 화가의 화폭 속으로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중세 소도시 피엔차에서 내려다본 발도르차 농촌 풍경. 발도르차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농경지 개간에 경관의 개념을 도입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풍경을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부드러운 능선을 감싼 드넓은 초지, 언덕 꼭대기에는 그림 같은 저택이 자리하고, 하늘로 삐죽하게 솟은 사이프러스 가로수가 도로 양편에 일직선으로 늘어서서 길을 안내한다.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맑아지는 풍경이 끝없이 연결된다. 요샛말로 ‘안구 정화의 끝판 왕’, 이탈리아 중부 발도르차(Val d’Orcia) 지역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발도르차의 경관은 인접한 발디키아나(Valdichiana) 지역으로 고스란히 확산됐다. 오르차와 키아니 강을 중심으로 길이 100km에 달하는 방대한 지역이다. 발도르차와 발디키아나는 행정지명이 아니라 해발 300~700m 이탈리아 토스카나주(州) 시에나(Siena)의 구릉지역을 일컫는다. 한국으로 치면 영동ㆍ영서지역 하는 식이다. 한국의 마을이 양지바른 산기슭에 안기듯 자리 잡은 것과 달리 발도르차의 마을은 모두 언덕 꼭대기에 성처럼 둥지를 틀었다. 대부분 중세시대에 도시국가로 출발했기 때문에 자체가 요새나 마찬가지다.
이탈리아에서 ‘코뮤네(Comune)’라고 부르는 이 언덕 위의 마을들은 인구 규모로는 한국의 면 단위 수준이다. 큰 도시라 해도 1만명에 못 미치고, 적은 곳은 수백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세의 외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저력은 만만치 않다. 발도르차는 이런 도시를 품고 확장됐고, 도시는 발도르차를 기반으로 내실을 다져 왔다. 유럽의 고풍스런 관광지의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번잡하지 않아, 휴식과 충전이라는 여행 본래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곳이다. 어딜 가나 여행객으로 넘쳐나는 유명 관광지에 비하면 마을을 통째로 전세 낸 듯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여/행/수/첩]
●발도르차 중세 도시 여행은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시골 도로의 정취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차량 대여는 도심을 벗어나기 복잡한 공항이나 로마 시내보다는 키우시(Chiusi)역에서 하는 것이 편리하다. 키우시에서 발도르차의 작은 도시까지는 대부분 1시간 이내 거리다. 도로가 한산해 운전이 힘들지 않고, 마을 어귀마다 공용주차장이 있어 주차도 쉬운 편이다.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키우시역까지는 도로로 약 160km, 자동차든 기차든 2시간 정도 걸린다. 올해 안에 키우시에 정차하는 고속철도가 개통하면 시간은 30분 이내로 줄어든다.
●숙소는 키안차노테르메에 잡으면 편리하다.‘테르메(Terme)’가 한국어로‘온천’인 만큼 호텔이 밀집해 있다. 발도르차의 작은 도시마다 다양한 관광상품을 운영한다.‘발디키아나리빙 홈페이지( www.valdichianaliving.it )’에서 영어로 된 상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로마 피우미치노공항까지는 대한한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매일, 알리탈리아항공이 주 4회 운항한다. 로마가 목적지면 국적기가 무난하지만, 유럽 다른 도시로 환승할 경우 알리탈리아항공이 유리하다.‘로마 스톱오버’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72시간까지 피우미치노 공항에 무료로 수화물을 보관할 수 있고, 로마의 호텔도 할인 받을 수 있다. 시칠리아, 밀라노 등 이탈리아 국내선으로 갈아탈 경우에도 할인 운임을 적용 받을 수 있다. 알리탈리아항공은 한국 승객의 편의를 위해 기내 영화의 한국어 자막 서비스도 확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르테아노의 고풍스러운 골목.
피엔차와 경관농업의 효시 발도르차
여행의 시작은 피엔차(Pienza)다. 피엔차를 알면 발도르차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인구 800명의 작은 도시 피엔차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계획도시다. 이 마을 출신의 교황 피오(Pio) 2세가 건축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를 시켜 1459~62년 사이 건설한 골목과 건축물이 구조 변형 없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다.
아치형 대형 입구를 통과해 마을로 들어서면 골목 양편으로 3~4층짜리 벽돌 건물들이 길게 이어지고, 교황을 배출한 가문 이름을 딴 피콜로미니 광장에 닿는다. 광장은 4개의 건물에 둘러싸인 사다리꼴인데, 원근감을 없애 광장 귀퉁이에 서면 정사각형으로 보이도록 설계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성당, 시청, 대저택(궁전)으로 구성해 행정과 경제, 종교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르네상스적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 광장에서 대성당을 마주 보고 오른편에 피콜로미니 가문의 대저택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저택 뒤편으로 돌아 나가면 아기자기한 정원이 나오고 바로 아래로 발도르차의 평원이 드넓게 펼쳐진다. 정원이 테라스고 전망대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골프 코스로 착각할 초원이 부드러운 능선을 넘으며 끝없이 지어진다. 언덕 위에는 한두 채씩 띄엄띄엄 농가가 자리잡고, 주변에는 사이프러스 나무(측백나무과 침엽수)가 분필처럼 뾰족하게 솟아 맹숭맹숭한 풍경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짙푸른 색감을 더한다. 엽서 같은 풍경에 눈도 마음도 끝간 데까지 확 트인다.
피엔차에 이어 발도르차도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발도르차가 ‘자연유산’이 아니고 ‘문화유산’인 이유는 분명하다. 오랜 세월 인간에 의해 다듬어진 풍경이기 때문이다. 잔디밭처럼 보이는 초지는 사실 대부분 6월이면 누렇게 익어 갈 밀밭이고, 사이사이에 포도밭과 올리브밭이 섞여 있다. 성곽 도시를 일군 주민들의 땀과 노력의 산물이지만 발도르차는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다. 황무지를 개간할 당시부터 농지에 경관의 개념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수확량도 높이고 이왕이면 풍경까지 좋은 농경지,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요즘에야 6차 산업의 개념으로 시도하는 ‘경관농업’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는 ‘발도르차의 경관은 14~15세기 경제적 기반을 쌓은 시에나의 상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그들의 통치 이상을 반영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조성하기 위해 설계하고 개발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효율적인 농경지로서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즐거운 경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배치한 도시와 마을, 농가와 수도원 등이 그림 같은 목가적 풍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원추형 구릉을 드넓은 캔버스 삼아 그려 낸 독특한 풍경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그림은 르네상스 농촌 풍경의 전형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경관농업’ 혹은 ‘농업경관’은 기능적이면서 미적으로도 아름다워 오늘날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피엔차뿐만 아니라 몬테풀차노(Montepulciano), 산카시아노데이바니(San Casciano Dei Bagni), 페트로이오(Petroio)에서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발도르차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몬테풀차노는 한때 시에나와 경쟁할 만큼 이 지역에서는 제법 큰 도시(사실 인구는 5,000명 수준)다. 골목을 거닐다 보면 오래된 구리 공예 대장간도 보이고, 나름의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와이너리도 여럿 있다. 전기로 운행하는 시티투어 버스를 타면 전망 좋은 곳과 골목 곳곳을 누비고, 마을 아래 농장까지 한 바퀴 돌아 온다. 40분 투어 비용은 8유로다.
사르테아노의 에트루리아 지하 무덤 벽화. 주민들은 패션기업‘구찌’가 이 그림을 무단 도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몬테풀차노 광장에서 한 남성이 두 아이의 사진을 찍고 있다.
에트루리아의 후손, 원조 로마인의 자부심
발도르차 지역은 에트루리아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눈에는 멋스러운 옛 건물과 골목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만 해도 부러운 일인데,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중세의 건물보다 에트루리아 문명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훨씬 커 보였다. 기원전 650년경 이탈리아 중부지역을 장악한 에트루리아 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연결고리쯤으로 이해되는데, 명확한 실체에 대해서는 지금도 연구가 진행 중이다. 키안차노테르메(Chianciano Terme), 사르테아노(Sarteano), 키우시(Chiusi)의 박물관은 예외 없이 에트루리아 유물과 유적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사실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에게 고조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격이어서 따분했는데, 박물관 해설사가 유물 하나하나마다 정성을 다해 설명하는 바람에 딴청을 피우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하면 키안차노테르메 고고학 박물관은 에트루리아인들의 장례 풍습과 관련한 유물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옹관과 함께 전시한 도자기에는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그리스 유물과 같은 듯 다른 그림이 새겨져 있다. 키우시 시립박물관은 아예 ‘지하도시’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18세기에 저장고를 만들기 위해 건물 지하를 파다가 발견한 에트루리아인의 지하도시가 곧 박물관이다. 당시의 우물과 수로, 석관을 모아 놓은 공간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키우시 성당 지하에도 안내인과 동행하지 않으면 길을 잃을 만큼 복잡한 미로가 있다. 포르세나 왕의 무덤과 수로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에트루리아인의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된 키우시에는 별도의 국립박물관도 있다. 사자의 몸에 여성의 얼굴을 한 테라코타를 비롯해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사르테아노에는 에트루리아인의 무덤과 벽화가 남아 있다. 도심 외곽 포도와 올리브 나무가 심겨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박물관에 문의해야 찾아가기 쉽다. 이곳 지하 무덤은 로마시대에 목동들의 쉼터와 거주지로 이용됐는데, 한 무덤에는 망자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뱀 벽화가 인상적이다. 이 그림은 패션 브랜드 ‘구찌’에서 재킷 디자인에 사용하기도 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아 무단 도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구찌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민들의 불만이 커 보였다.
중세 도시를 전세 낸 듯한 여유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빠져나오면 언덕 아래로 또 발도르차의 파란 들판이 펼쳐진다. 포도밭 고랑에는 씀바귀 종류의 노란 풀꽃과 꽃양귀비의 붉은 꽃잎이 화사하다. 고대 유적도 좋지만 수학여행이 아닌 다음에야 여유롭게 이국의 정취를 즐기는 게 먼저다. 사르테아노(Sarteano), 체토나(Cetona), 스크로피아노(Scrofiano), 시나룽가(Sinalunga), 트레콴다(Trequanda) 등 발도르차의 작은 중세 도시들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 중앙에는 어김없이 전 주민이 모여도 넉넉한 광장이 있고, 그 광장을 중심으로 식당과 카페와 기념품 상점이 자리 잡았다.
아이들이 공놀이를 즐길 정도로 평일 광장은 언제나 한가하다. 커피 한잔 시켜 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평화롭다. (이탈리아에서 ‘아메리카노’를 찾기는 어렵다. 커피를 시키면 에스프레소가 기본이고, 아메리카노를 시키면 물을 조금 탄 진한 커피가 나온다.) 깔끔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골목에선 사람보다 살찐 고양이를 만날 확률이 더 높다. 촬영장으로 전세 낸 듯 온갖 포즈를 취해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는다. 테라스마다 화사한 화분 장식에도 눈길을 주고, 골목 끝자락마다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하며, 마을을 전세 낸 듯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다시 광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마을마다 꼭 봐야 할 것도 있다. 사르테아노에는 옛 수도원을 개조한 산타키아라 호텔 전망이 일품이고, 트레콴다에는 체크무늬 외관의 피에트로 안드레아 교회가 자랑이다. 체토나는 지그재그로 오르는 골목이 운치 있고, 스크로피아노는 견고한 성처럼 보여 외부에서 더욱 멋지다. 풍경은 사람이 만든다는 명제가 이곳만큼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발도르차의 중세 도시는 보여 주기식 관광지가 아니라, 여전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생활공동체다. ‘보존’과 ‘복원’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한국의 민속마을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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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안차노테르메(이탈리아)=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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