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기자 시절에 낑낑대며 토막기사를 써내면 편집자가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팽개치기 일쑤였다. “엿장수 맘대로” 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옛날 엿장수의 ‘권한’은 실로 대단했다. 빈 병, 고무신짝, 고철 따위를 받아줄지 여부는 물론 그 평가액도 제 맘대로 였다. 똑같은 병이라도 엿을 어느 날은 많이, 어느 날은 적게 줬다. 아무도 불평하지 못했다.
미국엔 엿장수가 없지만 ‘엿장수 맘대로’ 식의 장사를 할 수도 없다. 워싱턴주 리치랜드의 꽃집 주인 배로넬 스터츠먼이 그렇게 장사했다가 큰 코 다쳤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는 지난 2015년 동네 단골 게이커플이 결혼식장 장식 꽃을 주문하자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어야 한다”는 기독교 교리를 내세워 단호히 거절했다가 줄 소송 당했다.
미국 인권자유연맹(ACLU)은 게이커플을 대리해 스터츠먼의 ‘알렌스 꽃집’이 성소수자를 차별했다며 제소했고, 밥 퍼거슨 워싱턴 주 법무장관은 그녀의 꽃집이 주 소비자보호법을 위반했다며 별도로 고소했다. 주 헌법에 보장된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들어 항변한 스터츠먼 은 항소법원과 주 대법원에서 모두 패소판결을 받고 연방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 연방 대법원이 지난 4일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1심과 항소심의 판결을 모두 뒤집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 판결은 스터츠먼 케이스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보다 3년 앞서 콜로라도 주 레이크우드에서 역시 게이커플이 주문한 결혼식 케이크를 제과점 주인 잭 필립스가 스터츠먼 처럼 종교적 양심을 들어 거절한데서 비롯된 케이스였다.
콜로라도 주 인권위원회는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달라는 게이커플의 요청을 필립스가 거절한 건 명백한 성차별이라며 그의 ‘매스터피스 제과점’을 제소했다. 인권위원회는 동성결혼이 당시 콜로라도에선 불법이어서 이들 커플이 매사추세츠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덴버로 돌아와 피로연을 열려고 그 케이크를 주문한 것이라며 거절당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필립스는 생일, 결혼기념일, 퇴원, 승진 등의 축하 케이크는 얼마든지 좋지만 할로윈, 이혼, 동성애자 축제 따위의 케이크는 종교적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게이커플의 웨딩 케이크에는 남녀 아닌 두 남자가 손을 잡은 인형을 장식해야 한다며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 라고 주장했다.
꽃집 케이스와 똑같이 차별금지와 종교자유의 헌법조항이 맞서 인권 및 기독교계의 많은 관심을 모은 4일 재판에서 연방 대법원은 뜻밖에 하급법원 판결들을 뒤집고 업주 필립스의 손을 들어줬다.
그것도 7-2의 압도적 표결이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 등 골수 보수 대법관 4명은 물론 스티븐 브레이어와 엘리나 케이건 등 대표적 진보 대법관들도 동조했다.
이날 다수 판결문을 집필한 중도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이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노예제도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등 역사상 모든 차별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종교적 신념이 이용되기 일쑤였다”고 말한 콜로라도 인권위원회를 비판했다. 정부기관으로서 필립스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했고, 결과적으로 수정헌법의 종교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케네디(85) 대법관은 판결문 서두에서 종교적 양심의 자유가 게이의 인권을 무시할 권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못 박아 성소수자들로부터도 환영받았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매스터피스 케이스에만 한정된다고 밝혀 스터츠먼 케이스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정은 협소한(narrow) 판결이라는 평을 들었다.
매스터피스(Masterpiece)는 ‘걸작’을 뜻한다. 케네디 대법관은 매스터피스 케이스에서 ‘매스터피스 판결문’을 쓴 셈이다. 수정헌법이 종교의 자유와 차별금지를 동시에 보장하는 한 앞으로도 매스터피스나 스터츠먼 케이스가 계속 나올 터이고, 매번 연방 대법원 판결도 달라질지 모른다. 왠지 케네디 대법관의 걸작 판결문이 ‘엿장수 판결문’처럼 느껴진다.
<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팔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종교의 자유는 인정해야죠
닭이 먼저냐 닭걀이 먼저냐 싸우는격, 내 생각엔 종교의 자유는 각자 집 대문안에서의 자유고, 개 인의 자유는 나라의 혼란을 막기위해 대문밖 어디에서도 보장되어야한다는게 내생각, 그렇다면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다분이 저질 정치적 판단이라 생각하는 내가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