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매직 노동자의 발, 하이힐·회사에서 지급한 유니화
▶ 볼 좁고 딱딱해 발 비틀어지고 통증, 무지외반증·하지정맥류 등 시달려
발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였다. 엄지와 새끼발가락은 각각 바깥쪽과 안쪽으로 휘었고 발가락과 발등이 연결된 관절도 눈에 띄게 돌출돼 있다.
발의 주인은 서울시내 유명 면세점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판매직 노동자. 화려한 페디큐어가 처연해 보일 만큼 심각한 변형은 수년간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종일 서서 일한 대가다. 고급스러운 매장 분위기와 밝은 미소, 깔끔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곪아 가는 판매직 노동자들의 아픈 현실과도 닮았다.
심각한 족부 질환
사진(바로 위)을 살펴본 김범수 인하대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사진만으로 정확한 진단은 어렵지만 엄지발가락이 휘면서 제1 중족골이 돌출되는 ‘무지외반증’과, 같은 증상이 새끼발가락에 생긴 ‘소건막류’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통증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며 “수술이 간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화점 및 면세점에서 종일 서서 일하는 판매직 노동자들 사이에선 이와 비슷한 사례가 흔하다. 한국일보 ‘View&(뷰엔)’팀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을 통해 입수한 판매직 노동자들의 발 사진 150여장 중 상당수에서 위와 비슷한 족부 질환 의심 현상이 관찰됐다. 김 교수는 “이 같은 변형을 방치할 경우 관절염이나 지간신경종 등 합병증이 생길 수 있다”며 “볼이 넓은 신발을 신고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각자 다른 발 모양을 일률적이고 딱딱한 ‘유니화’에 맞춰야 하는 것은 물론 앉아서 쉴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 분위기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들은 구두 속에 꽁꽁 숨겨 온 발을 드러내며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기사화될 경우 회사의 역추적이 우려되므로 이름은 물론 성씨나 나이, 근무지 등을 절대 밝히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질병과 통증 안고 사는 서비스 노동자들
14일 서울시내 한 면세점에서 만난 6년 차 판매직 직원 A씨는 밀려드는 고객을 응대하고 물건을 포장,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는 “5개월 전 발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다가 무지외반증과 족저근막염 진단을 받았다. 최선의 치료법이 휴식이라지만 휴식 시간조차 없는 현실에선 꿈도 못 꾼다”며 한숨을 지었다.
하지정맥류와 같은 혈관계 질환도 흔하다. 또 다른 면세점에서 근무하는 B씨는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을 땐 아침에 입고 나온 바지를 입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퉁퉁 붓는다. 20대라서 스스로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작년에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고 충격이 컸다”고 했다.
고객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화장실도 자유롭게 가지 못한다. 화장실을 찾는 빈도를 낮추기 위해 물을 마시지 않거나 장시간 소변을 참다 방광염에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인은 휴식 시간ㆍ공간 부족
원인은 부족한 휴식 시간과 휴게 공간의 부족이다. B씨의 경우 하루 일과 중 유일하게 보장된 휴식 시간은 1시간 내외인 점심시간뿐. 그러나 구내식당이나 휴게실은 한꺼번에 몰린 직원들을 수용하기에 비좁다. 결국 탈의실에 깔개를 깔고 앉거나 계단에 쪼그려 앉아 다리의 통증을 완화시키는 정도로 만족하고 만다.
연차 휴가마저 마음대로 못 쓰는 이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먼 남의 나라 얘기다. 금ㆍ토ㆍ일요일은 연장 근무가 예사인데다 부족한 인원으로 교대 근무를 하다 보니 가족과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 자녀를 둔 직원들 중엔 자책감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정의 달’ 5월은 그들에게 유독 힘든 시기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현실
열악한 근무 환경은 노동자와 고용주, 유통사 사이의 복잡하고 애매한 관계에 의해 방치된다. 판매직 노동자의 상당수가 고용주인 입점 업체 대신 유통사의 근무 지침을 따라야 한다. 백화점이나 면세점은 ‘서비스의 질’을 앞세워 근무 환경 개선을 외면하고, 고용주인 입점 업체는 입ㆍ퇴점 결정권을 갖는 유통사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정경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국장은 “유통 및 판매직은 대표적인 여성 일자리지만 제때 쉬지 못하면서 겪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크다”며 “매장 내에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를 비치하거나 휴게 공간을 확보하는 등 근무 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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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기자·박서강기자·김희지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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