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쩍고, 씁쓰레한 억지웃음이 있다.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의 동명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요한 모리츠가 지은 어정쩡한 웃음이다. 루마니아 농부인 그가 2차 대전 전후 독일군과 연합군에 유배당한 끝에 13년 만에 집에 돌아와 아내가 낳은 독일군의 아들을 안고 종전홍보 관리의 “웃어라”는 지시에 따라 카메라 앞에서 지은 ‘25시 웃음’이다.
게오르규는 “인류의 모든 구원이 끝나버린 시간. 최후에서 한 시간이 지나버린 시간. 메시야가 다시 강림한다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시간”이라고 25시를 정의했다. 모리츠로 분한 앤소니 퀸은 ‘25시 웃음’으로 일약 대스타가 됐다. 9?11 테러사태 후 스파이크 리가 똑같은 제목으로 다른 내용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런 기막힌 웃음은 볼 수 없다.
보름 전 TV에서 모리츠와는 정반대 상황의 25시 웃음을 목격했다. 영화가 아니었다. 북한 감옥에서 25시 상황을 1년 넘게 살아온 3명의 한인이 지난 10일 꼭두새벽 워싱턴 DC 인근의 앤드류스 통합기지에 도착한 후 기자들과 환영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터뜨린 웃음이다. 환희에 차있었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엉거주춤한 25시 웃음이었다.
그 세 사람 중 하나인 김학송 목사가 지난 토요일 시애틀 동양선교교회에서 열린 세계 복음선교 연합회(WEMA) 총회에 참석했다. 풀려난 지 일주일이 지나 평정을 되찾은 듯 그의 얼굴에선 25시 웃음이 가시어 있었다. 중국 길림 태생으로 시민권자인 그는 L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중국으로 돌아가 WEMA 회원으로 선교활동을 해왔다.
김 목사는 371일 만에 쇼처럼 풀려났다. 1년 전의 체포상황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그가 감방에서 나온 것은 그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김정은과 만나 북미 정상회담 의제를 논의한 후 평양을 떠나기 불과 57분 전이었다. 그는 김상덕, 김동철 씨와 함께 폼페이오의 비행기에 오른 후에야 자신들이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앤드류스 군기지에서의 도착 쇼는 엄청 현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내외, 마이크 펜스 부통령 내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새라 허커비 샌더스 대변인 등이 밤중에 나와 이들을 영접했다. 이들을 직접 비행기에서 데리고 내린 트럼프는 “북미정상회담이 임박했다. 오래 동안 생각 못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보라”고 기자들에게 호언했다.
그 생각 못한 일이 이틀 전 벌어졌다. 오는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역사적 북미정상회담을 트럼프 자신이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이 판을 깼다며 트럼프를 비난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그 역시 깜짝 쇼일 뿐이다. 원래 쇼는 기복이 심할수록 더 재미있다. 김정은은 즉각 “참고 기다려주겠다”고 응수했다. 역시 그답지 않은 쇼이다.
북미정상회담은 처음부터 쇼처럼 시작됐다. 핵폭탄과 미사일 실험을 잇달아 강행하며 지구촌의 비난여론에 마이동풍이던 김정은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을 보낸데 이어 갑자기 남북한 및 북미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지난달 사상 처음 남한 영토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오며 셀리브레이션 쇼를 펼쳤다.
‘협상의 대가’를 자처하는 트럼프는 원래 TV 쇼맨이다. 김정은의 정상회담 제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고, 북한 땅인 판문점의 판문각을 회담장소로 제안했다. 자신의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을 은근히 부추기기도 했다. 북한의 공식명칭(DPRK)과 함께 김정은을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로 표기한 북미정상회담 기념주화까지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쇼는 계속될 터이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판을 깰 마음은 없다. 더구나 이미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한 김정은이 아무 보상 없이 회담을 포기할 리 없다. 북핵 제거와 한반도 평화 정착의 피날레를 이루기까지 쇼는 ‘밀당’을 계속할 터이다. 그러기 전에 3 김씨가 일찌감치 풀려난 것은, 본인들 말마따나, 쇼를 초월한 수많은 신도들의 기도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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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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