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채색ㆍ파스텔톤 수요 늘어, 침대ㆍ책상은 내추럴한 원목
▶ 회색이나 베이지색 벽지 쓰고, 채도 낮추면 부드러운 느낌
정치와 취향의 이슈가 맞물리며 국내에도 아이 방을 젠더 중립적으로 꾸미려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분홍, 빨강과 파랑은 각각 여아, 남아의 색으로 불렸으나 최근에는 그 같은 구분이 많이 흐려졌다.
한 집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안방? 거실? 정원? 다름아닌 아이방이다.
집에서 가장 약자인 아이의 방이 어떤 식으로 꾸며져 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가족 구성원들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고 앞으로 어떤 생을 꾸려갈지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아이방 인테리어는 미학과 윤리가 복잡하게 얽힌 난해하고도 흥미로운 영역이다. 미니멀리스트인 부모가 자신의 감수성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 아이방을 온통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한다면 이는 독선적인 일일까. 사랑과 억압 사이엔 경계가 없고 기대와 욕심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젠더도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아이를 일찌감치 성적 고정관념에 매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인테리어 업계에서 여전히 ‘공주님 방’ ‘왕자님 방’이란 말을 하고 있다면? 반대로 딸 아이의 장래희망이 공주님이라면? 부모도 완전할 수 없다. 아들이 핑크색 베개를 가지고 누나와 싸울 경우 많은 부모는 수심에 잠긴다. 내 아이방에 젠더를 ‘주입’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모든 부모는 결국 자신의 젠더 의식과 마주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핑크가 뭐길래!
‘젠더 이분법’의 주범으로 불리는 파랑과 분홍에 대해선 2007년 영국 뉴캐슬어폰타인대에서 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진화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로 이루어진 팀은 여성은 분홍을, 남성은 파랑을 선호하도록 진화했다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영국 학생 208명과 중국 학생 37명에게 여러 가지 색을 보여주고 가장 좋아하는 색을 고르라고 한 실험의 결과는, 남녀학생 모두 파란색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이다. 다만 분홍에 대한 선호도로 치면 여학생 쪽이 조금 더 높았다. 이후 학계와 언론에서 흔히 일어나는 비극이 벌어졌다.
연구진은 파란색이 청명한 날씨와 깨끗한 물을 뜻하기 때문에 모두가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한 뒤 여성의 분홍 선호에 대해 “수렵-채집 시절 주로 채집 활동을 했던 여성에게 빨갛게 잘 익은 과일을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란 가설을 내놨다. 영국 일 간 더 타임스는 이에 ‘과학, 남자 아이는 파랑을 좋아하고 여자 아이는 분홍에 사족을 못 쓰는 이유를 드디어 밝혀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더 타임스는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분홍색을 좋아하도록 프로그램화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결과는 이후 수많은 반론에 부딪쳤다. 런던대 버크벡칼리지의 문화미디어 학부 조교수인 개빈 에번스는 저서 ‘컬러 인문학’(김영사)에서 분홍이 소녀의 색이 된 건 1950년 이후라고 주장했다. 일례로 1897년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 중 다음과 구절이 있다.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으로 간주되지만 어머니들은 그 문제에서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
책은 분홍이 소년의 색이었던 이유 중 하나로 빨간 피와의 연관성을 든다. ‘남자다운 빨간색’에서 파생된 밝은 분홍이 소년의 색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녀의 색으로 바뀐 건, 단순히 아동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그렇게 제안을 했고 그게 먹혔기 때문이다.
“내 아이방, 내 방처럼 세련되게”
다행히 국내 인테리어 업계에서는 여아방, 남아방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이 꾸준히 완화되고 있다. 여기엔 2000년도 초반부터 열풍을 이어온 북유럽 스타일의 힘이 컸다. 김민정 까사미아 기획팀 선임은 “과거 아동 가구 업계에서는 ‘여아는 빨강ㆍ분홍, 남아는 감색ㆍ파랑’이 기본이었으나 최근 중간 색조를 추가로 제안하는 일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 측면에서 볼 때 남아용ㆍ여아용으로 구분된 제품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뚜렷한 편입니다. 그러나 최근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여기에 북유럽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젊은 부모들을 중심으로 무채색 제품이나 채도가 낮은 파스텔톤 제품을 찾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요.”
김 선임에 따르면 변화의 배경에는 ‘젠더 중립’이란 정치적 이슈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방을 세련되게 꾸미고자” 하는 소비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은 아니다. 정치와 미학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보완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분홍 혹은 파랑 천지인 아이방은 미학으로서든 윤리로서든 이제 설 곳이 별로 없어졌다는 것이다. 진보적이고도 세련된 아이방 인테리어를 위해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1. 베이지와 그레이에 주목하라
핑크와 블루를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연두색이나 노란색을 택하는 것이다. 아이가 좋아한다면 보라색이나 주황색도 괜찮은 대안이다. 그러나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희선 꾸밈바이 대표는 “그레이와 베이지를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오색찬란한 아이들 장난감으로 정신 없는 방에 회색이나 베이지색 벽지를 바르면 전체적인 톤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요. 과거엔 이런 무채색에 가까운 톤을 아이방에 쓰는 걸 꺼리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칙칙해 보일까 봐 걱정이 된다면 벽 하나에 핑크+그레이+블루 등 2,3개의 색을 같이 쓰는 방법도 있다. “그레이는 함께 썼을 때 어울리지 않는 색깔이 없어요.”
2. 가구가 아닌 침구, 커튼으로 포인트
아이방 꾸미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들의 성장속도다. 전문가들은 바꾸기 어려운 침대, 책상, 책장은 무채색이나 원목의 내추럴한 톤으로 택하고, 대신 쉽게 교체할 수 있는 침구나 커튼으로 포인트를 주라고 말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에 감화된 딸아이가 공주방을 요구한다면 공주 침대를 살 게 아니라 레이스 커튼을 달아주는 식이다. 미우가 디자인 스튜디오의 김현철 대표는 “아이는 빠르게 자라고 성장에 따라 가치관도 계속 변한다”며 “부모가 원하는 공간을 아이에게 쥐어줄 게 아니라 집안 전체의 톤에 맞춰 기초 인테리어를 하고 아이의 요구에 따라 소품을 활용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3. 채도를 낮춰라
아이방에 어떤 색을 쓰든, 심지어 분홍과 파랑을 쓴다 해도 채도를 낮춘다면 그에 담긴 함의를 탈색시킬 수 있다. 회색빛이 감도는 옅은 분홍이나 어두운 하늘색, 귀리가루처럼 허여멀건한 색을 원색과 적절히 섞으면 활기차고도 감각적인 아이방을 완성할 수 있다. 김민정 까사미아 기획팀 선임은 “색을 사용할 때 아이의 선택을 유도하거나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며 “그러나 전반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원할 경우 채도를 낮추기만 해도 한결 부드럽고 편안한 공간 연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4. 아이에게 여백을 허락하라
아이들은 몇 살부터 자신의 젠더를 인식하고 그에 따른 역할을 수행할까. 영국발달심리학저널에 따르면 여아는 만 2세부터 분홍색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남아들은 만 4세가 되면 분홍색을 거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해야 사회에 무난하게 편입될 수 있는지 깨닫는 시기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이럴 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비우는 것이다. 공간 한 켠을 백지로 남겨두거나 칠판으로 만드는 것. 낙서판이 될 수도 있고 좋아하는 포스터를 붙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공주방, 왕자방이 된다고 해도 이는 아이의 사회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어른들이 지금도 겪고 있듯이.
5. 부모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 믿지 마라
‘핑크 벽지 때문에 내 딸이 진취성을 잃으면 어쩌나’ 고민하는 초보 아빠, 엄마들이 있다. 인테리어뿐 아니라 양육 전반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아이가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건축가 출신 전 국회의원 김진애씨는 저서 ‘집놀이’(반비)에서 우리 사회가 “아이를 위하는 방법”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꼬집었다. “우리 대부분은 ‘위한다’는 은근한 압력 때문에 아이들에 대해서 오히려 더 심하게 압력을 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기 십상이다. 아이란 위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는 존재, 자라는 존재, 같이 사는 존재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란 같이 기뻐하는 존재, 같이 배워가는 존재, 같이 느끼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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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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