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애월읍, VT하가이스케이프
▶ 방해받지 않는 쉼터 되려면, 공간을 막을까? 뚫을까?
제주 애월읍 중산간마을 하가리에 자리한 VT하가이스케이프. 관광이 아닌 휴식을 목적으로 제주를 찾는 이들을 위한 숙소다. [사진= 이승희 작가 제공]
B동 외부 거실. 침실과 주방을 제외한 모든 곳의 지붕을 없애 제주의 자연을 한껏 끌어들였다. 뒤쪽에 낮게 쌓인 돌담은 노천탕이다. [사진= 이승희 작가 제공]
C동 앞 데크. 마당을 향해 데크와 처마를 길게 빼 외부 거실처럼 사용할 수 있다. [사진= 이승희 작가 제공]
놀 것인가, 쉴 것인가. 여행을 떠난 이들에게 주어진 즐거운 고민이다. 밖으로 나가자니 모처럼 빌린 숙소가 울고, 집에 박혀 있자니 바깥의 온갖 신기한 볼거리들이 아깝다.
지난해 제주 애월읍 하가리에 들어선 VT하가이스케이프는 고민하는 여행자들에게 단호히 말한다. 집에 머물 것. 이런 단호함은 매년 1,5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이제 관광지보다 쉼터의 기능이 강화된 제주도라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독방 VS 광장, 혼자를 만드는 법
VT하가이스케이프의 건축주는 화장품 회사 VT코스메틱의 정철 대표다. 틈날 때마다 머리를 식히러 제주도를 찾는 그에게 한라산이나 천지연폭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전 그냥 쉬러 가는 거예요. 사방에 아무도 없이 저 혼자 있는 것 같은 공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쉼과 더불어 VT코스메틱의 제품들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찾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낙점이 됐다. 애월 바닷가에서 도보로 30분 거리 중산간 마을에 자리한 5,613㎡(약 1,697평)의 너른 땅을 놓고 건축가 4명이 머리를 맞댔다.
피그건축사사무소의 김대일ㆍ이주한 소장, 에그플랜트 팩토리의 최한메 실장, 그라운드 아키텍츠의 김한중 소장은 같은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던 동료 사이다. 이들은 제주도가 더 이상 한국인들에게 신기한 관광지만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옛날처럼 한라산과 성산일출봉을 패키지로 보고 오는 시대는 지났죠. 그럼 지금 제주에 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뭘까요. 저희가 내린 결론은 ‘망명’입니다. VT하가이스케이프는 이미 제주도를 여러 번 가본 사람들, 그러나 또 다시 일상의 망명지로서 제주를 택한 이들을 위한 곳이에요.”
돌아다니기 위한 여행지가 아닌, 떠나기 위한 여행지. 국내의 여러 휴양지 중 오로지 제주만이 이런 기능을 할 수 있는 데는, 서울과 멀리 떨어진 거리와 고립된 섬이라는 요인이 동시에 작용할 것이다. 건축가들은 ‘도망쳐온 곳’에서 어떻게 하면 혼자 있다는 느낌을 구현할 수 있을까에 골몰했다.
논의는 막힌 공간이냐, 뚫린 공간이냐로 좁혀졌다. “벽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을 때” 혼자라고 느낀다는 의견과 반대로 “광활한 공간이 펼쳐지고 거기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혼자인 걸 알 수 있다는 의견이 부딪쳤다. 독방이냐, 광장이냐. 두 가지 안을 본 건축주는 “둘 다 하고 싶다”고 말했다.
건물은 A, B, C, 3개 동으로 나눠진다. A동과 B동은 침실, 주방, 거실로 이뤄진 1,2인용 독채다. 돌담으로 구불구불하게 짜인 동선 속에서 방문자는 계속해서 벽과 마주한다. 입구로 들어서면 주방이 가로막고, 주방을 통과하면 침실 벽을 마주하며, 침실로 들어서면 전면 창 밖으로 돌담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서 있다. 성인 남성 키를 웃도는 높이의 돌담은 외부로부터 온전히 밀폐됐다는 안도감을 더해준다.
돌담으로 꽁꽁 둘러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 A, B동과 달리 C동은 드넓은 마당을 향해 활짝 열린 구조다. 건축가들은 1,700여평에 이르는 대지 중 한가운데 1,649㎡(약 498평)만 사용함으로써 앞마당, 뒷마당을 크게 남겨뒀다. C동은 마을을 등진 채 북쪽 앞마당과 마주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농지는 이곳에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현관부터 주방, 식당, 거실, 침실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평면은 전면창으로 인해 드라마틱한 입면을 완성한다. “원래는 둘로 나눌까 하다가 극적인 효과가 떨어질까 봐 한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직 앞마당의 용도가 정해지진 않았지만 건축주가 스몰웨딩 같은 이벤트를 고려하고 있어서 숙박 외에도 다양한 쓰임새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요.”
야생의 휴식, 날 것의 주말
프라이버시 외에 또 하나 중요한 건 제주의 자연을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아무리 쉼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해도 제주에서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내 집처럼 편안해야 하지만 정말 내 집과 똑같으면 안 되겠죠. 저희가 생각한 건 ‘날 것의 주말(raw weekend)’이에요. 굳이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이 안에서 가공되지 않은 제주의 속살을 느낄 수 있으면 했습니다.”
건축가들은 A, B동에서 침실과 주방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공간의 지붕을 없앴다. 거실과 식당은 바깥 공기에 그대로 노출돼 햇볕, 바람, 멀리 바다 냄새까지 들여온다. 거실 한쪽엔 노천탕을 설치해 고립의 로망을 완성했다. 한겨울엔 거실과 식당 사용에 제약이 있지만 “비일상적 경험”을 강조하기 위해 과감하게 시도했다.
“365일 정주하는 집이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었죠.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에겐 불편함도 비일상을 환기하는 특별함이 될 수 있어요. 야외 거실에 앉아 돌담을 마주 보고 바람을 맞으면 도시를 떠나 제주에 망명 왔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C동 앞에는 넓은 데크를 설치해 외부 거실처럼 쓸 수 있게 했다. 커튼을 열어 젖히면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초록이 내외부의 경계를 흐린다. 건축가들은 여기서 좀더 욕심을 부려 C동 옥상에 작은 백사장을 만들었다. 모래가 깔린 옥상에 올라 비치체어에 누우면 맑은 날엔 서쪽 애월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백사장 뒤쪽으로는 돌담을 길게 쌓아 마을과 A,B동으로부터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했다. 정원 곳곳에는 제주에서 가로수로 쓰이는 먼나무를 비롯해 선인장, 용설란, 야자수 등을 심었다. 돌담부터 백사장, 야자수까지… 제주 안에 또 다른 작은 제주를 만든 셈이다.
바깥에서 본 VT하가이스케이프는 그저 몇 개의 지붕과 돌담으로만 보인다. 주방은 평지붕, 침실은 박공지붕, 사무실이 있는 곳은 농가창고를 본 딴 둥근 지붕이다. 각 실에 따라 지붕 모양을 달리 한 이유는 “마을처럼 보이고 싶어서”다. “최대한 제주를 닮고자 담장 높이나 건물 한 채의 크기, 골목의 너비도 마을의 평균을 따랐어요. 여기 쉬러 오는 사람에게 제주다운 풍경을 선사함과 동시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제주의 모습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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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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