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문하면 바로 원두 갈고, 물 부어 내리는 브루잉 커피
▶ 본연의 향을 느긋이 즐겨, 2005년 미국서 1호점 낸 뒤
지난해 말 커피계의 애플, 블루보틀이 서울 삼청동에 한국 첫 매장을 낸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3월 진출은 무산됐지만 여전히 블루보틀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다. <한스미디어 제공>
미국 오클랜드주에 있는 블루보틀 본사. <블루보틀 홈페이지>
블루보틀 창립자 제임스 프리먼이 사이폰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사이폰 커피는 브루잉 커피의 일종이다. <한스미디어 제공>
지난해 12월 미국 커피전문점 블루보틀이 올 3월 서울 삼청동에 1호점을 낸다는 보도가 나왔다.
커피업계의 애플, 미국 3대 스페셜티 커피(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100점 중 80점 이상을 받은 프리미엄 커피) 중 하나로 꼽히는 블루보틀이 한국에 온다는 말에 커피 마니아의 반응은 기대를 넘어선 열광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미국과 일본에서 맛본 블루보틀의 추억이 넘쳐났고, 열기만 하면 달려가 몇 시간이고 줄을 서겠다는 약속이 줄을 이었다. ‘오보설’이 나오기도 했다. 국내 한 인터넷 매체가 직접 미국 블루보틀 본사 PR담당자에게 문의한 결과, 한국 진출설은 “오보(false news)”라고 했다는 것.
3월이 지난 지금 블루보틀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결과적으로 3월 진출설은 오보가 됐지만 진출설마저 사실무근인 것은 아니다. 네슬레코리아(네슬레가 블루보틀을 소유하고 있음) 마케팅부서는 “우리와 무관한 사업이라 전혀 정보가 없다”고 하는 반면, 업계 관계자들은 삼청동 한 켠에 이미 가림막을 치고 공사 중이라며 “들어오는 건 분명하다”고 말한다. 뭐가 어떻게 돼가는지 알 수 없는 지금, 확실한 건 블루보틀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커피, 블루보틀
블루보틀은 ‘기다리는 커피’다. 한국 사람들이 블루보틀을 기다리기 전부터 미국인들은 매장 앞에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렸다. 시원스럽게 한 컵씩 나오는 스타벅스 커피와 달리,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커피, 그러나 품질 좋은 원두를 주문 받은 즉시 갈아 정성스럽게 내리는 커피, 이게 블루보틀의 이미지다.
커피 로스터(원두를 볶는 사람)로 시작해 20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헤이즈밸리에 블루보틀 1호점을 낸 제임스 프리먼은 그 전 간이매장에서 커피를 팔 때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말한다. 프리먼은 저서 ‘블루보틀 크래프트 오브 커피’(한스미디어)에서 블루보틀 앞에 선 줄을 처음으로 본 2004년 1월의 하루에 대해 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동계 팬시푸드 박람회를 코앞에 둔 날이어서 수많은 요리사들과 요식업계 관련자들이 시내에 몰려 들었다. 그날, 고개를 들어보니 커피 카트 앞에 갑자기 열다섯 명 정도의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매장 앞에는 사람들이 항상 그런 식으로 줄을 섰다.”
프리먼은 컵 사이즈를 스몰, 미디엄, 라지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통일했다. 한 번에 많은 커피를 추출하지도 않았다. “주문이 들어오면 원두를 분쇄하고, 분쇄한 원두를 필터에 담고, 그 위에 물을 천천히 부어” 내리는 블루보틀 커피는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를 지난 세대의 커피로 밀어내며 ‘커피계 제3의 물결(Third wave coffee)’이라는 용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는 이미 이런 커피를 알고 있다. 그렇다, 드립 커피다. 홍익대 앞과 강남과 삼청동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메뉴 아래 있는 드립 커피, 심지어 스타벅스에도 있는 ‘오늘의 커피’다. 그럼 한국 커피 마니아는 왜 블루보틀을 기다리고 있을까.
블루보틀, 초창기엔 에스프레소 중심
블루보틀의 드립 커피를 정확히 지칭하면 브루잉 커피다. 드립 커피가 일반적으로 백조목 같은 주둥이가 달린 주전자로 커피가루 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며 물을 붓는 핸드 드립을 이른다면, 브루잉 커피는 그보다 더 폭넓은 개념으로 커피가루에 물을 부은 후 필터로 걸러 만드는 모든 커피를 이른다. 프렌치프레스, 모카포트, 에어로프레스, 사이폰 등을 이용한 커피가 모두 브루잉 커피에 속하며 내리는 방식도, 맛도 모두 다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블루보틀 초창기엔 에스프레소가 중심이었다. 프리먼은 로스터로서 좋은 원두를 세심하게 볶아 손으로 내리는 브루잉 커피를 선호했고, 사람들도 이를 좋아했지만 대세인 아메리카노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가 했던 브루잉 방식은 미국과 호주에서 주로 했던 포어 오버(Pour Over)로, 일본식 드립 커피와 달리 커피와 물의 비율을 중시하는 반면 붓는 과정 자체에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수북이 쌓은 커피가루 위에 빠르게 물을 붓고 막대로 휙휙 저어 내리는 블루보틀 커피에 변화가 생긴 건 프리먼이 일본식 드립 커피를 접하면서다. 그는 일본 도쿄의 차테이 하토 카페에서 드립 커피 중에서도 내리는 방식이 매우 섬세한 융드립 커피를 맛본 뒤 “어안이 벙벙하다가 불쑥 분노가 치밀었다”고 말한다. “나는 왜 지금까지 이런 커피를 내리지 못했던 걸까?”
프리먼은 2007년부터 일본 커피기구와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 블루보틀의 브루잉 커피 맛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재미있는 건 일본 드립 커피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한국뿐 아니라 종주국인 일본마저도 블루보틀에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국내 최초의 브루잉 전문카페인 홍익대 앞 ‘5브루잉(brewing)’의 도형수 바리스타는 “문화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일본과 한국의 커피는 깍듯하고 정교하죠. 마치 90도로 인사하는 것 같아요. 반면 미국과 호주의 커피는 손을 올리고 ‘하이’하는 느낌입니다. 블루보틀이 일본의 드립커피를 획기적이라고 느꼈다면 그 깍듯한 태도 때문일 거예요. 반대로 일본이 블루보틀을 좋아하는 건 자기들과 다른 격식 없는 자유로움 때문이겠죠.”
미국은 일본을 신비롭게 여기고, 일본은 미국을 멋있게 느끼고, 한국은 일본과 미국을 모두 좋아하는, 이 오래된 관계 한가운데 블루보틀이 있다.
한국에도 제3의 커피가 올까?
한국이 일본식 드립 커피에 익숙하다고 해도, 블루보틀이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블루보틀이 가져온 ‘제3의 물결’에는 드립 기술뿐 아니라 스페셜티 커피, 약배전(원두가 황갈색이 되도록 가볍게 볶은 단계), 싱글 오리진 커피(원두를 섞지 않고 하나의 원두로만 내린 커피) 등 원두 본연의 향을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려는 움직임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드립 커피는 알지만 사이폰은 생소한 한국에, 블루보틀은 브루잉과 스페셜티 커피라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국내 커피업계가 블루보틀 진출을 반기는 이유다.
도형수 바리스타는 “소비자들이 와인처럼 커피를 산지별, 품종별로 구분하고 소비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전엔 손님들에게 원두를 고르게 하면 싫어했어요.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블루보틀 같은 대형 스페셜티 커피업체가 들어오면 커피를 대하는 자세도 훨씬 빨리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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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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