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준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전 유엔대사
남북과 북미 2개의 정상회담에 관심이 쏠린 와중에 북중 정상회담이 기습적으로 열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전통 우방인 중국의 정상을 만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단지 워낙 상황이 빠르게 변하니까 상식적 예측도 어려웠던 것 같다.
김정은 집권 후 첫 중국 방문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비핵화 의사와 북미 정상회담 계획을 중국 측에 직접 확인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측의 정상회담 결과 발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한미가 선의로 우리의 노력에 응해 평화 안정의 분위기를 조성해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를 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는 무슨 뜻일까.
북핵에 관해 가장 포괄적인 합의가 이뤄졌던 참여정부의 2005년 9·19공동성명은 비핵화 조치와 함께 미국 등 여타 5개국이 취해나갈 조치들을 담았다. 당사국들은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해 단계적 방식으로’ 에너지 제공, 북미관계 정상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따라서 9·19 공동성명의 내용과 방식은 북한이 말한 ‘단계적 조치’ 협상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지난 2005년과 비교할 때 적어도 두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첫째, 북한이 그간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핵화 협상에서 북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북한은 손에 넣은 핵 능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2005년보다 더 큰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경제적 보상뿐 아니라 그들이 주장하는 ‘체제 안전 보장’을 위한 조치도 수준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미국 등은 북한이 핵무기를 실제로 갖게 된 상황에서 말로만 핵 포기를 표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보게 됐다. 즉 아직 핵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핵 개발을 중지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요즘 ‘북핵 협상의 입구에 동결을 둘 수 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는데 어떤 의미의 ‘동결’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과거 북핵 관련 합의에서 사용된 전문용어로서의 ‘동결(freeze)’은 상징적 의미의 도발 중지가 아니고 보유 핵물질의 정확한 신고와 확인에 바탕을 둔 핵활동 중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에 대해 사상 최고 수준의 국제제재가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재가 없던 상황에서는 시간을 끌수록 북측에 유리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는 그 반대다. 특히 최근 북한의 입장 변화가 제재와 압박의 효과라고 보는 시각에서는 굳이 조속한 협상을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는 국제적으로 입법과 같은 효과와 절차를 갖기 때문에 대북제재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결의가 필요하다. 필자는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의 목적이 실현되지 않았는데 제재를 완화하는 결의를 채택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비핵화에도 시간이 걸리고 제재 완화에도 시간이 걸린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장거리 핵 능력 완성이 임박했다는 시한에 쫓기는 것 같다. 그래서 무력 사용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한은 어떤 ‘단계적 조치’를 들고 나올까. 미국은 어떤 신속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북한은 비핵화 조건으로 한미훈련 중지,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안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고 국제제재의 우선적 해제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분명한 핵 포기 의사를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선 비핵화 후 보상’의 소위 리비아식 해법을 북한이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실제 비핵화에 앞서 어떤 방법으로 북한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장거리 핵 능력까지 보유했다고 선언한 북한이 국제사회에 어떻게 진정으로 핵무기를 포기하겠다는 확신을 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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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준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전 유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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