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22
▶ ■박동선, 미 의회 청문회에 서다

1978년 박동선의 미 의회 증언을 둘러싼 미 신문들의 보도내용들. 오른쪽 사진의 왼쪽인물이 존 플린트 위원장, 오른쪽은 레언 재워스키 특별검사.
-플린트 위원장의 개회사
1978년 4월3일. 하원 레이번 빌딩 2141호에 스며든 열기는 완연한 봄기운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하원의원 435명 중 1/4에 해당하는 최소 115명의 의원이 한국 측, 특히 KCIA의 돈을 받았다고 해서 여론이 들끓는 와중에 미국의 송환 요구를 거부해오던 박동선이 침묵을 깨고 증언에 나선 것이다.
그의 입에서 코리아 게이트의 검은 진상이 쏟아져 나올 것이란 예상과 재워스키 특별검사가 뭔가 한방을 터트려줄 것이란 기대감이 맞물리면서 청문회장은 달아올랐다. 재워스키, 그가 누구인가. 4년 전, 워터게이트 특별검사로 닉슨 정부의 법무장관과 백악관 변호사를 포함한 고위 관료들을 감옥에 보내고 닉슨 대통령을 탄핵 직전에 사임시킨 ‘영웅’이었다.
하원 윤리위의 중인환시(衆人環視)리의 청문회는 플린트 위원장의 개회사로 막을 올렸다.
“이 청문회는 박동선이 선서 하에 자발적으로 하는 것으로 그는 한국시민이다… (중략) 그간 한국의 안보는 특히 미국과의 문제에서 어려운 극한사항이 있었다. 한국은 미국에 의존하는 바가 많고 협력해왔다.”
그의 개회사를 듣던 나는 이상한 변화를 감지하고 귀를 기울였다. 얼마 전까지 한국을 몰아붙이던 그가 마치 한국을 옹호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다소 들떠 있던 방청석에서는 플린트 위원장 발언의 의미를 눈치 채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이 청문회는 진실을 밝히는 게 목적이다.” 한국을 힐난하는 내용은 끝까지 없었다.
-박동선의 모두 발언
박동선이 선서를 마친 후 증언석에 앉았다. 그는 먼저 모두 발언을 했다.
“여기 앉으니 미국의 안방에 앉은 기분이 든다. 이 기회에 미 국민들과 정담(情談)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나왔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세상은 날 사기꾼, 악한 불법자, 음모꾼으로 규정했으나 난 아니다. 그걸 아신 우리 어머니는 졸도해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다. 난 죄인이 아니다. 미 의회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증언을 하러 나온 것이다.
난 사업가이다. 그간의 일련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업가의 성공담이다. 이 사업을 위해 나는 모든 상상력, 노력, 인내, 일관성을 유지했고 성공했다. 그리고 이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한미관계를 증진시키고 상호 이익을 도모하려고 노력해왔다. 물론 실수도 많았다. 인정한다. 그러나 난 죄인이 아니고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 앉았다. 그 목적은 내 명예를 회복하고 의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며 미 의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증언대에 섰다는 그의 발언은 뜻밖이었고 다분히 도전적이었다. 다음날 미 신문들은 불쾌한 심사를 감추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냐. 성공담? 의회의 존엄 회복이라고?…”
-박의 영어실력과 대담함
박동선이 던진 메시지는, 그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한 것이지 한국 측, 특히 KCIA의 지시를 받은 게 아니다, 그 밑에서 일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의회 청문회에 선 그의 전략적 기초였다. 청문회 내내 그는 그 기조를 훌륭한 영어실력으로 뒷받침했다. 그의 진술서는 완벽했고 발음도 미국인을 뺨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능변(能辯)에 달변이었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외견상 그는 위엄 있고 당당했으며 오만할 정도로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반면에 불리한 질문에는 미꾸라지처럼 교묘히 피해나갔다.
앞서 비공개 증언 시에 이런 일도 있었다. 바깥에는 기자들 수십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카푸토 의원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자들에게 흘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박동선이 “Mr. Kaputo!”를 부른 다음 한마디 했다.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한다. 밖에 나가 기자들에게 자꾸 폭로하는데 여기에 더 있어라.”하고 핀잔을 준 것이다. 카푸토 의원은 얼굴을 붉히며 한마디 대꾸조차 못했다.
보통 의회에 출석한 장관이나 정치인들도 의원들 앞에서는 쩔쩔매곤 했다. 그는 천하의 재워스키 특검이 몰아붙여도 담대하게 이야기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방어했다. 아마 외교관을 했으면 훌륭한 인물이 됐을 것이다.
-재워스키 특검의 질문
박동선의 구두 진술 후 재워스키 특별검사의 질문이 시작됐다. 그는 시종 박이 미 의원들에게 준 돈에 대해 추궁했다. 박의 일기와 회계장부, 비밀 증언한 내용을 근거로 의원의 이름과 돈을 준 시기, 액수를 대며 질문을 해댔다.
그러자 박은 자신의 기억과 일기, 회계장부를 참조하며 돈을 준 의원은 30명이고 액수는 100불, 200불, 500불, 1,000불에서 어떤 의원에게는 수천 불, 수만 불을 줬다고 증언했다. 그 총액은 75만불이었다. 그리고 처음 2년간은 수표(Check)로 주다가 1973년 대미 쌀 에이전시를 회복한 후부터는 현금을 봉투에 넣어 제공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증언을 들은 하원 윤리위에서는 박동선이 돈을 준 내용에 관해 모든 진실을 완벽하게 증언했다고 판단했다.
박은 동시에 쌀 수입을 통해 900만 달러를 벌었지만 일부만 미 의원들에게 줬고 나머지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개인이 썼다고 첨언했다. 또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해 돈을 준 미 의원의 수나 액수를 과장되게 이야기한 것이며 실제는 의원 수도, 금액도 최소한이었다고 밝혔다.
-反 박동선 라인들
박동선의 이른바 쌀 사업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쌀 산지인 캘리포니아의 리처드 핸나 의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면서 한국의 대미 쌀 수입 에이전트가 된 것이다. 핸나 의원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69년, 70년에만 70만 달러를 벌어 그 일부를 미 의원들에게 썼다.
하지만 박동선을 좋지 않게 본 한미 정관계 인사들이란 암초를 만나 71년 에이전시를 뺏기고 말았다. 대표적인 반박(反朴) 인사들은 김동조 주미대사와 윌리엄 포터(William J. Porter) 주한 미 대사, 그 뒤를 이은 필립 하비브(Philip C. Habib) 대사였다. 또 국무부의 도널드 레이너드 한국과장도 박동선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이 미 의회에서 증언할 당시 퇴임한 상태였기에 민간인 신분으로 TV 방송사의 ‘해설’을 맡았다. 그 방송사는 레이번 빌딩의 청문회장 근처에 중계석을 마련해 마치 실황 중계하듯 청문회를 방영했다. 레이너드는 박이 발언할 때마다 하나하나 해설했다.
그 사실은 안 박동선이 “바깥에 지금 코리아 증오 인사가 방송하고 있다. 그게 한국과장을 지낸 레이너드다”라고 항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포터 대사와 패스맨 의원
루이지애나 출신의 아토 패스맨 하원의원도 처음에는 박동선을 싫어했다. 한국을 방문한 그는 포터 미 대사에게 “박은 악한(惡漢)이다. 미 의회에도 좋지 않고 한미관계를 해칠 인물이다”라고 경고했다. 하원 세출위의 외국원조 분과위원장이던 그의 파워는 막강했다. 박동선이 쌀 수입 에이전시를 뺏긴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박동선이 쌀 수입을 맡았던 69년 당시부터 미 조야에서는 그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69년 3월 다수당인 민주당의 칼 앨버트 원내총무가 의원 사절단을 이끌고 방한한 적이 있었다. 이 사절단을 조직한 것이 박과 핸나 의원이었다. 그러나 박은 희망과는 달리 사절단과 동행할 수가 없었다. 국무부와 주한 미 대사관에서 그의 로비활동에 경각심을 보이며 동행을 거절한 것이다.
포터 대사의 반대는 특히 심했다. 그는 박의 소환을 한국 정부에 요구할 정도였다. 아니면 박을 한국의 로비스트로 정식으로 등록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박은 로비스트 등록을 하지 않았다. 등록을 하게 되면 정부 인사와의 접촉 내역, 경비와 모든 활동사항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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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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