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love me (사랑의 찬가) 노래: 브렌다 리
1960년 초 부터 근 10년 동안 끊임없이 여성팬이 즐겨듣던 명곡이다. 1961년 브렌다 리”가 취입한 LP 레코드 “Emotion” 에 삽입된 이 노래는 원래 1940년 프랑스의 국민 여가수 “에디뜨 피아트”가 작사하고 “Margueritt Monnot” 가 작곡한 프랑스 상쏭 이 오리지널이다. 국내에서는 “에디뜨 피아프” 노래는 거의 알려 지지 않고 “브렌다 리” 가 부른 노래만 사랑 받았다.
가사내용은 “태양이 하늘에서 요동치고 바다가 갑자기 말라 버린다 해도 그대로 두세요.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난 개의치 않아요. 세상 모두를 잃는다 해도 난 계산하지 않고 계속 미소를 지으며 살아 갈 거예요. 그대로 두세요. 난 개의치 않아요. 그대가 날 사랑하는 한. 하늘에 떠 있는 유성을 잡아서 그대가 있는 곳으로 갖다 드릴까요. 그대가 원한다면 전 지체없이 할 거예요. 그리고 어떤 테스트를 원하신다면 지시 하세요. 무엇이던지 전 할 거예요. 그대가 날 사랑 하는 한. 지구가 종말이 온 다해도 그대가 날 사랑 하는 한 개의치 않아요. 최후의 눈물까지 함께 나눌 거예요” 그야 말로 사랑의 노래 중 최대의 찬미가이다.
“브렌다 리”는 1044년 12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그녀는 이미 2 살때 부터 음악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듣고 곧바로 휘파람으로 따라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4살 때 부터는 캔디 스토어 앞에서 캔디 혹은 코인을 얻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예쁜 용모에 우렁찬 목소리로 6살 부터는 본격적인 프로 세계로 들어섰다. 한Elementary School 에서 주최한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보답으로 애틀랜타 라디오 방송국에 전속 가수로 1년 동안 출연을 보장 받았다. 10 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여러 TV 나 라디오 방송국이 주관하는 각종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상금을 타는 것이 유일한 돈 버는 수단이었다.
어릴적 부터 키가 작아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때에는 마이크 스탠드를 최대한 낮추고 나무 받침대 위에 올라가 노래했다. 그러던 중 1955년 그녀가 11살 되는 무렵 칸츄리 계의 거장 Red Folley 가 ABC TV 프로그램 “Ozark Jubille” 홍보차 조지아주 오거스타를 방문 했다. 이 때에 지방의 라디오 디스크 쟈키가 그녀를 TV 프로에 출연 할 수 있도록 적극 추천했다. “Red Folley”는 그녀의 노래 몇 소절 들어본 후 리허설 없이 곧 바로 무대에서 노래하도록 허락했다.
이 프로그램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주어진 기회에 “Jambalaya”를 거침없이 불러 청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리곤 그들은 계속해서 앵콜을 요청하여 겨우 11 살을 지난 “브렌다 리”는 이후 3곡의 앙코르 송을 부른 후에야 무대에서 내려 올 수 있었다. 몇 십년이 지난 후 TV Show program 진행자이자 칸츄리 뮤직의 거장 “Red Folley” 는 그 날의 감격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 브렌다 리”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난 한없는 전율 속에 빠져 들었다. 조그마한 체구에 그토록 어린 나이의 소녀에게서 다이나믹하고 우람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의 온몸을 무아지경으로 만들었다. 내 눈은 멍 해지고 내 입은 2마일 까지 벌어질 지경이었다. 그리곤 난 한 동안 무대를 떠날 수 가 없었다.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감격은 잊을수가 없다. 내 수십년의 연예 세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감동의 순간 이었다.”
이 날의 성공으로 “브렌다 리”는 성공의 탄탄대로로 진입했다. 1956년 레코드 회사인 “데카”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첫 번째 취입곡 “Jambalaya”를 시발점으로 1957년에는 “Dynamite”, 1960년에는 “Sweet nothin’s, I’m sorry”, “I want to be wanted” 등 밀리언셀러 노래를 계속 발표하였다. 1958년과 1960년 두번 발표한 크리스마스 케롤송인 “Rocking around the Xmas tree”는 500 만장 이상 판매를 기록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라디오에서 매일 방송되는 스탠다드 케롤 송이 되었다.
1961년 엘범 “Emotion”을 발표했다. “If you love me” 는 이 앨범에 삽입되었는데 미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허나 한국에서는 1960년대에 가장 많은 청취 희망 곡을 받은 노래이다. 집안에 수돗물 시설도 없는 가난한 집. 여러 형제 자매가 한 침대에서 자야 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1960년대 최고의 수퍼 스타로 군림한 그녀의 노력과 재능에 박수를 보낸다. 그야말로 60년대는 그녀의 황금기였다.
엘비스, 비틀스, 레이 찰스와 함께 가장 많은 힛트 곡을 팝 차트에 올린 가수로 기록 되고 있다. 1960년 후반 한국 이화여대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145cm 의 자그만한 체구에서 품어 나오는 그녀의 다이나믹한 목소리는 누구나 그녀의 매력에 녹아든다. 그녀의 별명은 “Little Miss Dynamit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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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 라디오 DJ 및 팝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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