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인 대학생 조승희의 버지니아텍 난사사건 이후 수많은 총기 관련 칼럼을 썼지만 명쾌한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책 없이 반복되는 참극”의 현실을 전할 때 마다 대책을 아예 외면하는 듯한 “연방의회의 총기규제 데자뷰”에 좌절하며 “얼마나 더 죽어야…”를 되물어 왔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26명이 살해당한 텍사스 시골 교회 난사사건 후 “이젠 안전지대가 없다”는 무기력한 재확인이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총기폭력에 대한 절망적 결론이었다.
그런데, 17명이 희생된 플로리다 주 고교 총격참사 한 달이 지난 요즘 무언가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하다. 포기했던 총기폭력 대책에 대한 희망이 감지되고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살해당하는 것을 공포와 충격으로 목격하고, 그 피로 얼룩진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눈물어린 얼굴로 총기폭력에 맞서는 힘든 싸움의 최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직면했던 이들의 단호한 투지,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은 스스로 지켜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의 애처로운 용기를 어느 부모가 외면할 수 있겠는가.
미 사회를 경악케 했던 컬럼바인 고교 총격참사 당시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은 ‘총기난사 세대’다. 화재나 지진 등과 함께 총기폭력이 불가항력의 재난으로 방치된 세상에서 초등학교부터 총기난사 대피훈련에 익숙해왔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어두운 교실 벽장에 숨어 울기만 하던 어린애가 아니다. 보호받을 권리를 요구하며 힘을 합해 행동에 돌입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플로리다 고교 생존자들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를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총기참사 발생 때마다 “지금은 총기규제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다”라는 정치가들을 향해 이들은 벌써 말했어야 할 “너무 늦은 때”라고 반박했다. “NRA(전미총기협회)의 돈을 받은 정치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총기난사를 예방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우린 (그 말을) 헛소리(We Call BS)라 부른다”고 공격하며 정면으로 맞섰다.
정치적 계산이 없어 순수하고 젊어 용감한 학생들의 절박한 요구는 봇물처럼 쏟아진 미디어 보도를 통해, 아이폰세대의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거듭된 좌절 끝에 죽어가던 총기규제 투쟁을 재 점화시킨 것이다.
이들의 파워는 이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론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3월초 실시된 갤럽조사에서 67%가 현행 총기판매법의 강화를 지지했다. 지난 10년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이다.
플로리다의 공화당 주 의회와 공화당 주지사가 심상치 않은 이 사태를 파악했다. 총기구매 연령을 21세로 올리고 범프스탁을 금지하는, 20여 년 만에 첫 규제 법안을 통과시켰다. ‘총기 애호’ 주 당국이 NRA에 반기를 든 것이다. 진보적인 워싱턴 주에서 보수적인 아이오와에 이르기까지 다른 주들에서도 규제강화법 통과와 규제완화법 철회가 잇따르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시간이 지나 열기가 식어가기만을 기다리던 연방의회도 (아기 걸음마 정도이기 하지만)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3일까지 반드시 통과시켜야하는 옴니버스 예산안 마지막 협상에서 수요일 현재 양당지도부가 총기구입자에 대한 신원조회 강화와 학교안전대책 기금 지원 항목을 포함시키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TV중계되는 의원들과의 회의에서, 또 생존 학생들 및 희생자 유가족들과의 만남에서 총기규제 강화를 약속했지만 며칠 후 약속을 저버리며 NRA 편으로 돌아서 버렸다.
NRA는 대통령도, 의원들도 굴복시켜온 여전히 막강한 워싱턴의 실세이지만 사명감으로 뭉친 10대 투사들에겐 극복 불가능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의 결집된 보이스에 이미 상당수 기업들이 NRA와의 유대 단절을 선언했다. NRA의 돈과 로비에 강력한 해독제로 부상한 이들이 NRA의 진정한 ‘대항마’가 될 수 있을지는 정계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지난주 14일 미 전국 3,000개 학교가 동참한 전국 워크아웃 행사에선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이 17명 희생자들을 기리며 17분간 시위를 벌였다. 컬럼바인 총기난사 19주년을 맞는 4월20일엔 두 번째 전국 워크아웃이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이번 주 24일엔 워싱턴에서 플로리다 고교 생존 학생들이 이끄는 대규모 집회 “우리들 생명을 위한 행진”이 열린다. 50만~100만 참여를 예상하는 이번 행사에서 이들은 구체적 총기규제법 성사를 요구하는 한편 유권자 등록과 투표 참여 운동도 벌일 것이라며 선언했다 :
“학교에서 걸어 나온 우리는 이제 투표소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투표로, NRA에 굴복하고 총기규제를 외면하는 정치가들을 의회에서 쫓아낼 것이다…우린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니다.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 원할 뿐이다”
이들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총기법의 확실한 변화를 위한 풀뿌리 운동의 첫 걸음일 수도 있지만 아직 어린 학생들에겐 엄청난 도전이다. 이들의 투쟁이 일회성으로 시들어 버리지 않고 지속적인 무브먼트로 뿌리 내리려면 확실한 리더십과 치밀한 전략을 갖춘 조직으로 발전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변덕스런 뉴스의 속성에 따라 이들을 무대 중앙에 올려놓았던 조명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떠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것”이라고 이들은 다짐한다. 지난달 플로리다 주의회에 선 학생대표도 강조했다. “우린 이 변화를 실현시킬 겁니다. 오늘 안 된다면 내일, 내일 안 된다면 내년에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말을 믿으십시오”
역사가 거듭 증명해온 ‘영 파워’의 강력함을 이들도 갖출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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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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