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3시경 우리들은 일제히 교실에서 뛰쳐나와 교문을 가로막은 선생님들을 따돌리고 높다란 벽돌담을 뛰어 넘었다. 전열을 재정비한 후 대전 공설운동장을 향해 행진하며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외쳤다.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장 경찰관들에 포위당해 개 패듯 얻어맞았다. 많은 친구들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수십명이 경찰국으로 연행됐다.
까마득한 옛날,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말기였던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1~2학년생 (당시 3학년생은 졸업) 1,000여명이 벌인 반독재 가두시위는 40여일 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4.19 학생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3.8 의거’로 불리는 그날 시위는 대전고의 전설이 됐다. 당시 대전공설운동장에선 민주당의 장면 대통령 후보가 첫 유세연설을 하고 있었다.
가물가물했던 고교시절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만 58년 후인 지난 14일 미국에서도 고교생들의 ‘의거’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하와이까지, 알래스카에서 플로리다까지, 미국 전역에서 고교생 수만명이 오전 10시 교실을 빠져나와 거리에서, 또는 교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물론 반독재 시위가 아니다. 총기규제 강화와 학교안전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이젠 그만(Enough Is Enough)’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미국 고교생들의 ‘3.14 의거’는 꼭 한 달 전인 2월 14일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의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무차별 총격사건에서 생사고비를 넘긴 학생들이 주도해 전국 캠페인으로 승화됐다. 이날 시위학생들은 더글러스 고교사건의 희생자 17명을 한 사람당 1분씩 기리며 17분간 묵념시위도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아침 당당하게 교실에서 걸어 나왔다. 우리가 선생님들의 꾸지람과 정학처분 경고를 무릅쓰고 담장을 뛰어넘은 것과 판이하다. 학생들의 교실퇴장(school walkout)을 막은 학교가 더러 있었지만 교사와 학부모들이 시위에 가세한 학교가 더 많았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와 제이 인슬리 워싱턴 주지사도 시위에 동참해 학생들을 격려했다.
시위 규모가 가장 컸던 워싱턴DC에선 고교생 2,000여명이 백악관을 등지고 서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트럼프 대통령의 선거구호)를 빗댄 ‘학교를 다시 안전하게’ ‘총 말고 아이들을 보호하라’ ‘다음은 나의 (죽을) 차례?’ 등의 피켓을 흔들었다. 다른 도시에선 ‘어른들은 아이들 같고 아이들은 어른들 같다’며 기성세대를 비아냥하는 피켓도 눈에 띄었다.
더글러스 고교 학생들은 ‘3.14 의거’ 열흘 후인 오는 24일 또 한 차례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55년전 ‘직업과 자유를 위한 행진’을 주도하며 “나는 꿈을 갖고 있다”고 포효했던 국립광장에 모여 더글러스 고교 참사에 사용된 AR-15 대량살상 무기의 판금, 총기구입자 신원배경 철저 조사 등을 연방의회와 백악관에 촉구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오는 20일엔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교에서 19년 전 같은 날 두 무차별 총격범에 희생된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추모하는 ‘전국 학교퇴장의 날’ 시위가 또 한 번 예정돼 있다. 이날도 고교생들이 자발적으로 오전 10시 교실에서 나와 13분간 묵념한 뒤 연방 및 주정부들에 포괄적이고 효율적인 총기규제 강화법을 마련하라고 촉구할 계획이다.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미국에서 고교생들의 시위가 폭발한 것은 이례적이다. 사회운동 전문 역사학자 데이빗 파버 교수(캔자스대학)는 대량살상의 단골 피해자 그룹인 10대들이 주도한 ‘3.14 의거’가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 고교생 시위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학교 퇴장’ 시위가 정치권에 실제로 반향을 일으킬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여고생은 학생운동 외에 미국에 변화를 가져올 추진력이 없다며 “국민이 원하는 총기규제 강화를 의회가 들어주지 않을 때는 들을 때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나도 그녀 또래였던 58년전 똑 같은 생각으로 급우들과 함께 학교담장을 뛰어 넘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3.8 의거’의 약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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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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