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쇼라는 말이 참으로 실감난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현기증이 날 정도다. 불과 석달 전까지도 미국본토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핵폭탄과 미사일 실험을 밥 먹듯 했던 북한의 ‘로켓맨’ 김정은이 태도를 180도 바꿔서 남북한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자청하고 나섰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핵무기 포기를 협상 의제로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김정은은 지난 5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사절단을 1시간 남짓 접견하면서 깜짝 놀랄 말들을 쏟아 냈다. 두 차례 정상회담 동안에는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했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피해 연기됐던 대규모 한미연합 ‘새끼 독수리’ 군사훈련이 이달 말 실시돼도 괜찮다고 말했다. 매년 훈련 때마다 방방 뛰며 비난했던 태도와 판이하다.
김정은의 변덕 덕분에 문 대통령은 4월말 판문점에서 급조된 3차 남북 정상회담 쇼에 출연하게 됐다. 김대중-김정일의 1차 회담(2000년)도, 노무현-김정일의 2차 회담(2007년)도 쇼였다. 11년만의 이번 정상회담은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 간의 역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여는 서막일 뿐이다. 김정은의 속내는 당연히 문재인이 아닌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 특사단을 이끌고 평양을 다녀온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을 8일 오후 백악관에서 접견하고 김정은의 회담 초청장을 전달받았다. 김정은이 조기 북미 정상회담을 희망하며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표명했고, 향후 핵^미사일 실험을 자제하겠다고 한 말을 정 실장으로부터 브리핑 받은 트럼프는 “5월 안에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갑자기 이처럼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불문가지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엔 안보이사회를 통하거나 자체적 방법으로 북한에 가한 ‘맥시멈 경제압박’ 조치를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해 상에서 석유를 밀수입하는 구차한 모습이 인공위성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경제제재 압박을 더 조이도록 트럼프 행정부에 주문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김정은의 돌발 초청에 무덤덤했다. 선제타격, 코피작전 운운하며 북한은 물론 한국 국민들까지 겁내게 했던 그였지만 애당초 “적당한 조건이 아니면” 김정은을 만나지 않겠다고 단언했었다.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진다 해도 북한에 대한 맥시멈 경제제재는 계속된다고 다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모처럼 마음에 든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모두 ‘역사적 사건’으로 치부되지만 실질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까지 사례가 그랬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북한의 안보와 자기 족벌정권의 존속을 보장해주면 핵무기를 포기하겠다고 나올 터이고, 트럼프는 핵 포기 의사를 먼저 실천해 보이기 전엔 경제제재를 풀지 않겠다고 맞설 것이 뻔하다.
설사 김정은이 핵무기 포기를 약속해도 믿을 수 없다. 전에도 북한은 한국과 핵개발 중단 협상을 타결한 뒤 조건부로 내세운 경제지원을 받은 후엔 없던 일로 했다. 한국이 준 돈으로 핵폭탄을 만든 꼴이다. 김정은에겐 핵무기보다 더 포기 못하는 게 있다. 주한미군 철수 요구다. 이는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유지이자 김씨 왕국의 금과옥조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된다. 막말꾼인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포기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멍청한 짓을 할까봐서다. 안 그래도 트럼프는 사드(고고도 지역방어 시스템) 설치비 요구, 한미 자유무역협정 폐기위협, 최근엔 수입 철강의 고율 관세부과 결정 등 한국에 비우호적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도 주한미군 철수까지는 안 갈 것으로 믿는다.
두 달 남짓 후 열릴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 쇼가 큰 성과를 못 낸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다. 한반도의 긴장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문재인과 김정은의 정상회담 역시 이산가족 상봉 정도만 일궈내도 대성공이다. 무력도발을 하지 말라며 김정은에게 ‘뇌물’을 줘서는 안 된다. 강도가 강도짓을 하지 않는다고 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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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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