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 속 떫은 타닌, 공기 만나면 부드러워져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에는 기상천외한 와인 품평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가장 엽기적인 표현은 ‘유아살해’일 것이다. 최소 100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와인인 샤토 무통 로칠드 2000년산을 전혀 숙성이 안 된 상태로 삼켜버리는 모습을 보며 탄식하듯 내뱉은 것인데, 결국 초능력 수준의 재능을 발휘한 주인공 덕에 유아 상태였던 와인은 순식간에 성숙한 어른이 된다.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듯 병에 담긴 와인을 가느다란 물줄기로 바닥이 넓고 입구가 좁은 투명 용기에 옮겨 담고(디캔팅), 잽싸게 몇 차례 빙빙 돌리는(스월링) 기술을 선보인 것이다. 잠시 후 맛을 본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맛있어!’ ‘오호! 이거 당혹스러운걸!’
‘신의 물방울’의 이 같은 극적 장면은 디캔팅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심어놓았다. 어떤 와인이라도 숨을 쉬게 만들면 숨어 있던 맛과 향이 드러나면서 꽃을 피울 것이라는 환상.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는 디캔팅이 모든 와인에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때론 디캔팅이 와인의 품질을 떨어트리는 경우도 있다. 디캔팅까지는 아니라 해도 코르크 마개를 딴 뒤 30분이나 1시간 정도 지난 뒤 마셨을 때 맛이 더 좋아졌던 경험은 와인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개봉한 지 하루가 지난 와인의 풍미가 더 좋아지는 일도 드물게 생긴다.
공기에 오래 노출된 와인이 변질된다는 것은 상식인데, 단기적으로 어떤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기에 맛이 좋아지는 경우가 생기는 걸까. 유럽의 명문 와인 교육기관 영국 WSET 본원의 공식 인증을 받은 국내 유일의 와인 교육 기관이라는 WSA와인아카데미의 박수진 원장에게 물어봤다. “와인 속 타닌이 산소와 만나면 훨씬 부드러워지고 와인이 품고 있는 다양한 향도 발산이 잘 됩니다. 디캔팅의 목적은 와인의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침전물을 제거하는 한편 공기와 접촉면을 넓혀 떫은맛을 나게 하는 타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와인을 옮겨 담아 공기와 접촉하게 하는 과정은 ‘에어레이션(Aeration)’ 또는 숨을 쉬게 한다는 뜻으로 ‘브리딩(Breathing)’이라 부른다. 이때 주로 숨을 쉬는 주인공이 바로 타닌이다. 폴리페놀 화합물인 타닌은 여러 하위 단위의 단량체가 모인 큰 중합체로 단순한 구조부터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한 분자구조를 가진다. 와인 한 병 안에도 수백 가지 구조의 타닌이 존재하며 미묘한 맛의 차이를 만든다.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는 타닌은 단백질과 잘 결합하는데 타닌이 떫게 느껴지는 것도 침 속의 단백질과 결합해 침전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단백질 함량이 높은 육류가 타닌 함량이 많은 레드와인과 잘 어울리는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와인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타닌의 화학적 변화 과정에 관해 과학적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술인 와인에 어떤 과학적 비밀이 숨어있는지 아직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다만 타닌의 변화과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영국의 생물학 박사이자 와인 컬럼니스트인 제이미 구드는 “와인 속 타닌은 연구하기 무척 어려운 대상이기 때문에 고도로 정교한 분석 장치로 연구해야 한다”며 “아직은 과학적 데이터가 충분치 않기 때문에 와인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단정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타닌은 와인 숙성 과정에서 중합반응을 거치며 반복적으로 끊어지고 재구성되면서 화학적 구성이 변하는데 이런 변화가 와인의 맛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견해가 현재로선 통설이다. 와인의 다양한 향도 타닌의 축중합작용을 통해 조합된다. 마찬가지로 디캔팅과 에어레이션이 타닌의 분자구조 변화를 일으켜 맛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손홍석 동신대 한의예과 교수는 “디캔팅에 관한 과학적인 데이터는 없다”면서 “개인적으로는 디캔팅의 효과가 미미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겐 인지가 가능한 정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고려대 와인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을 지낸 와인 전문가로 최근 ‘와인 이즈(Wine Is)’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타닌이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분해되거나 다른 화합물과 결합해 침전됨에 따라 와인의 맛이 부드러워진다”면서도 “타닌이 제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 동안 와인을 열어놓는다고 해서 타닌 성분이 갑자기 크게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타닌은 포도의 씨와 껍질에 많은데 와인을 숙성시키는 오크통에서 우러나기도 한다. 껍질과 씨를 제거한 채로 만드는 화이트와인은 타닌 함량이 적어서 에어레이션 과정이 필요 없다. 레드와인도 포도 품종에 따라 타닌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에어레이션 시간 역시 달라진다. 숙성 정도는 그보다 더 중요한 변수다. 박수진 원장은 “카베르네 소비뇽처럼 타닌이 강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디캔팅이 필요하지만 피노 누아나 멀롯 같은 품종은 디캔팅 필요성이 덜하다”며 “충분히 숙성된 와인은 풍미가 이미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공기와 접촉하면 금방 맛이 변질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와인은 얼마나 공기를 접촉해야 좋은 걸까. 박 원장은 “품종, 빈티지, 숙성 정도, 보관방법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고 디캔팅 과정에서 자주 확인하며 마시는 방법밖에 없다”며 “맛과 향이 완성되지 않은 영(young)한 와인이라 해도 1시간에서 2시간 사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특별한 와인이 아닌 이상 하루 이상 열어놓는다고 맛이 좋아지진 않는다는 얘기다.
혹시 와인의 부패와 산화를 막기 위해 넣는다는 무수아황산이 빠져나가면서 맛이 좋아지는 건 아닐까. 박 원장은 “무수아황산은 아주 적은 양만 들어가기 때문에 와인의 맛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마개를 열면 금방 공기 중으로 날아가거나 없어지기 때문에 아주 예민한 사람을 제외하면 맛에 차이를 주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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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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