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19
▶ ■KCIA 뉴욕 거점장 손호영의 망명과 청문회
손호영이 미국 망명 ‘선물’로 가져온 KCIA의 1976년 대미 공작방안 문서.
-FBI와 한국 대사관의 대결
1977년 9월 중순, 또 한 명의 KCIA 요원이 미국 망명을 단행했다. 뉴욕 타임스 등 미국의 신문들은 뉴욕 총영사관 소속의 중앙정보부 뉴욕 거점장인 손호영의 망명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코리아 게이트 청문회와 조사 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워싱턴 주미대사관의 김상근 참사관에 이어 김형욱을 담당하던 KCIA 요원이 또 망명을 결행했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손호영의 망명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귀국 명령을 받은 손은 9월15일,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위원을 은밀히 만나 망명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6일, 손은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다. 그런데 그의 망명의사를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 측 요원들이 오후 5시 손의 거처에 들이닥쳤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망은 더 빨랐다. FBI 요원들이 바로 30분 전에 손을 빼돌린 후였다. 미국 측은 광범위한 정보망을 통해 한국 측에서 손의 거처를 덮치려 한다는 걸 알았다. FBI에서는 한국 요원들에게 손이 납치, 살해될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구출작전에 나선 것이었다.
-누가 한국대사관에 망명 정보를 흘렸나
그날 하원 프레이저위 조사팀 사무실의 널찍한 방은 살벌할 정도로 경직돼 있었다. 한국 측에서 손의 망명을 눈치 챈 것은 누군가 그 비밀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조사팀에서는 더윈스키 의원을 의심했다. 그는 공화당 소속으로 프레이저 위원장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며 한국 측을 옹호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누설자로 지목된 더윈스키 의원은 그러나 자신이 한국 측에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고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더윈스키(Edward J. Derwinski)는 프레이저 소위와 하원 국제관계위에서 이른바 소수파 ‘반골’이었다. 그는 프레이저의 독주에 내내 제동을 걸었고 한국 편을 들었다. 그래서 프레이저위에서는 그에게 질문사항이나 스케줄 등 정보를 차단했다. 더윈스키는 늘 청문회 직전에야 관련 정보를 들었다며 불평하곤 했다.
그는 1983년까지 하원의원을 하다 레이건 정부 시절 국무부 차관(Under Secretary for Arms Control and International Security Affairs)에 발탁됐다. 1989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보훈처가 부(部)로 승격되면서 초대 장관에 임명됐다. 장관 인준 청문회에서 그는 미묘한 발언을 했다. “내가 부주의로 본의 아니게 한국 측에 (손의 망명 소식을) 이야기한 것 같다.” 자신이 ‘범인’이라고 뒤늦게 살짝 실토한 것이다.
-망명 선물은 ‘76년 대미 공작 방안’
손호영의 의회 증언은 망명 두 달 후인 11월29일, 30일 이틀간 레이번 빌딩 2172호에서 이뤄졌다. 사람들은 그가 가져온 ‘망명 선물’에 주목했다. 김상근은 망명 선물로 ‘백설 작전’이라는 대미 매수 공작안을 가져왔지만 손호영은 ‘76년 대미 공작 방안’이란 한국정부의 비밀 대미 로비활동 계획서를 프레이저위원회에 넘겨주었다. 또 김형욱과 관련돼 전문으로 오간 KCIA 본부의 지시내용과 손의 보고서도 포함됐다.
‘76년 대미 공작 방안’이란 엄청난 제목의 비밀서류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손호영의 증언을 종합하면,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이 비밀공작 계획을 입안한 건 첫째는 월남 패망이 한국에 미칠 위험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북한이 미 의회와 행정부 내부 침투를 계획하고 있고 특히 동포사회 침투 의향이 있는 걸로 파악해서였다. 재일동포사회를 장악한 조총련처럼 미국의 한인사회도 조총련화 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동한 것이다.
-프레이저 “동맹국에 대한 전복행위다”
11월29일 손호영이 출석한 첫 청문회가 열렸다. 프레이저 위원장은 서두부터 한국을 공박했다.
“KCIA의 대미공작의 이유는 미 의회와 행정부, 학계, 종교계, 경제계 부문 지도자들을 포섭해 한국에 유리하게 조종하고 반대파들을 무마하려는데 있다. 이는 동맹국으로서 미국에 대한 전복행위(Subversion)다. 이러한 일탈행위로 과거에 좋았던 한미 국민관계에 암운이 뒤덮였다. 청문회에서 이 사실을 다 밝혀 양국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
‘미국에 대한 전복 행위’라는 삼엄한 표현도 마다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자 더윈스키가 소수파 대표로 반론을 제기했다. “현 한미관계에 불신과 암운이 드리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1년 반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사태가 한미관계를 악화시켰다.”
가시가 돋쳐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프레이저위원회의 활동이 바로 한미관계를 불신으로 몰아넣고 암운을 드리우게 한 원인이라는 비난이었다.
결론적으로 프레이저는 ‘동맹국에 대한 전복 행위’라며 철저히 규명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더윈스키는 “이 계획이 실행되었나?”라고 손호영에게 질문하며 ‘76년 대미 공작 방안’을 평가절하했다.
-더윈스키와 대사관 파티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은 코리아 게이트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극명하게 갈려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고 프레이저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당의 진보파들은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정책을 폭로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소수당이며 보수적인 공화당 의원들은 한국을 옹호하는데 주력했다.
폴란드계인 더윈스키는 반공의식이 강했다. 그는 당시 한국을 옹호하는 게 인기 없는 행위인 걸 알면서도 공적, 사적으로 친한파(親韓派)를 자처했다. 그의 두둑한 배짱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1977년 김용식 대사가 워싱턴에 부임했다. 국군의 날과 개천절을 경축하는 주미 한국대사관 파티가 매사추세츠 애비뉴에 있는 쇼람 호텔에서 열렸다. 파티 장은 미국의 조야 인사들은 물론 한인들로 북적댔다. 그런데 예년과 달리 호텔 앞에는 미국 신문과 방송기자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코리아 게이트 스캔들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자 어떤 인물들이 한국 대사관 파티에 오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대다수의 미 의원들은 취재진을 보고 허둥대며 발길을 돌렸다. 한국과 친하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더윈스키만은 취재진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왔다. 숨길 게 없다는 식이었다. 인상 좋게 생긴 그는 용기도 있는 정치인이었다.
-귀환명령 받고 망명 결행
청문회에서는 손호영의 망명 동기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손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김형욱이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 후 KCIA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김형욱이 의회 증언을 하게 되면 독소를 빼도록 노력하라는 것과 그가 아예 의회 증언을 못하게 회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서울로 소환될 것이란 말을 8월 중순에 들었는데 9월7일 귀환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망명을 생각하게 됐다.”
그는 김형욱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한국 측의 비밀 행동을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당시 40대였던 손호영은 중정에 입부한 이래 1970년 방콕, 75년 5월 텍사스 휴스턴 총영사관을 거쳐 76년 12월 뉴욕 총영사관으로 발령받았다. 박동선 사건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김형욱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손호영의 독백
청문회에서 지켜본 손은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기 행동에 대한 자책감과 자괴감 때문인지 신경과민적인 행동도 엿보였다.
청문회가 시작되기 전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지 말아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프레이저위원장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30일 아침, 워싱턴포스트지 전면에 그의 사진 대신에 캐리커처(초상화)가 크게 나 있었다. 그걸 본 손호영은 항의했다. 사진과 달리 그림을 그리는 건, 법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초상화는 사람들이 금방 잊어 먹어요.”
그도 김상근처럼 증언 과정에서 들릴 듯 말 듯 하게 말을 작게 했다. 그래서 “마이크를 앞으로 당겨 말하라”는 주의를 몇 차례 받았다. 그리고 대미공작 방안이 논란이 되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게 아닌데” “그냥 만든 건데” “예산 따기 위한 건데”… 그런 말이었다. 공작방안이 과대평가되고 부풀려 해석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통역하는 나 아니면 알아듣기 힘든 독백이었다. 그 독백이 의원들에게 들리면 통역을 해야 하는 나는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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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정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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