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TV 음악쇼 중에 ‘너의 목소리가 보여’ 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전에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 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상대방이 입을 열지 않고 마음속으로 생각만 해도 그 말이 들리는 초능력 청년이 주인공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고단한 삶을 버텨낸다. 하지만 마음속 생각은커녕 입을 열어 말하고 또 말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철벽같은 현실이 또한 엄존한다. 힘이라는 현실이다. 권력 가진 자, 권력 가진 조직 앞에서 힘없는 자들의 외침은 바람 앞 촛불, 말은 의사로 전달되기도 전에 짓눌려져버리곤 한다.
거대권력 전국총기협회(NRA) 앞에서 ‘총기 규제’의 외침이 그러했고, 권력체계의 상부 남성 앞에서 성추행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고발이 그러했다.
중력만큼이나 확고부동해보이던 그 힘의 구도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히 변혁이다. 한국에서는 성폭력 추방운동인 #미투 운동이 열풍처럼 사회 전반을 뒤흔들고 있고, 미국에서는 지난 연말의 #미투 회오리에 이어 이번에는 NRA 보이콧 열기가 뜨겁다.
법으로도, 정치로도 되지 않던 일이 어떻게 가능해진 걸까. 앞에서 지휘하는 지도자도 없고, 운동을 기획하고 총괄하는 조직도 없다. 자발적이고 자생적이며 산발적인 참여가 거대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소셜미디어이다.
트위터에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글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니 말해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더 이상 듣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너의 목소리’가 이제 눈앞에서 보이게 된 것이다. 2010년 ‘아랍의 봄’을 몰고 온 그 동력, 트위터 혁명이 미국에서, 한국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 14일 플로리다의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이후 ‘총기’에 대한 미국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AR-15 총탄세례 속에 친구들 17명을 무참하게 잃고 겨우 살아남은 학생들이 ‘다시는 안된다(#NeverAgain)’며 NRA와 NRA에 빌붙은 정치인들을 성토하고 나서자 총기규제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보이콧 NRA(#BoycottNRA) 등 트윗들이 쇄도하고, NRA 보이콧 청원운동이 벌어지자 기업들이 먼저 반응했다. 온라인에 NRA 제휴 기업 명단이 공개되고, 이들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 움직임이 보이자 기업들은 NRA 대신 소비자를 택했다. 소비자들의 힘이다.
델타, 유나이티드, 허츠, 버짓, 메트라이프 등 10여개 기업이 NRA 회원에 대한 할인혜택 중단 발표를 했고, 미국 최대 총기판매업체인 월마트와 딕스 스포팅 굿즈가 판매 규정을 바꾸었다. 21세 미만에게는 총기를 판매하지 않고, 공격용 소총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등이다. 미국에서 매주 1억5,000만 명이 샤핑하는 월마트의 결정은 무게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분위기가 총기규제 강화로 돌아가자 트럼프 대통령도 입장을 바꾸었다. 반자동 소총 구매 연령을 21세로 올리고, 구매자 신원조회를 강화하는 등의 규제안을 내놓아서 “오바마도 못한 일을 하려 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다음날인 1일 NRA 측과 회동 후 트럼프답게 다시 입장을 바꾸기는 했지만 총기와 관련해 미국사회에서 이만한 변화가 일어난 적이 없다. 총기규제 ‘트위터 혁명’은 계속 이어질 조짐이다.
한국의 지난 한 달은 말 그대로 화산 폭발이었다.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가 돌연 분출되듯이 피해 여성들의 가슴 밑바닥에 눌려있던 분노와 슬픔, 억울함, 자책과 수치심의 불덩이들이 세상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들의 폭로, 고발을 끌어내준 동력 역시 SNS이다.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수십년의 추행이 잡음 하나 없이 묻힐 수 있었던 것은 힘 있는 자를 감싸는 권력 시스템 덕분이다. 상명하복의 위계의식 강한 조직에서 힘없는 자는 목소리도 없는 법. 이들이 SNS를 통해 마침내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한사람이 말하니 비슷한 경험의 댓글들이 붙고, 이를 보고 용기를 낸 다른 사람이 또 말을 하니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면서, 말이 말을 이끌어내는 거대한 폭로의 물결이 이어졌다. 그래도 추행 사실을 잡아떼는 가해자들에게 피해 여성들은 실명과 얼굴을 공개했다.
한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연극계의 대부로, 인기 배우로, 교수로, 사제로 … 높이 추앙받고 존경받던 인물들이 줄줄이 시궁창으로 떨어졌다.
지난 한달의 #미투 운동으로 성추행 성폭력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하지만 문제의 실체를 세상에 알린 것만으로도 #미투는 성공이다. 성추행하면 어떻게 되는 지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앞으로는 누구도 권력만 믿고 함부로 여성을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화산폭발로 세상의 지평은 바뀌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시대는 지났다. 내 앞에서 을인 너의 목소리가 이제는 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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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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