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 인터뷰] 유니크 스펙트로닉스 윤석원 회장
▶ 미 이민국장 한국 안내 인연으로 미국에, 전자부품 동남아 수출로 미 대통령상까지

가주한미포럼 대표를 지낸 윤석원 유니크 스펙트로닉스 회장이 남은 여생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차세대를 위한 역사교육 등에 힘쓰겠다고 밝히고 있다. <박상혁 기자>
“6.25의 참화 속에서 형들은 다 횡사하고 저만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2014년엔 식도암 판정을 받고 또 한 번 생사의 기로에 섰지만 많은 분들의 기도 속에 서서히 회복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나의 삶에서 더욱 뜻깊은 해입니다”
가주한미포럼의 대표를 역임하며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앞장서는 활동으로 한인사회에 잘 알려진 윤석원(70) 유니크 스펙트로닉스 회장의 말이다. 윤 대표에게 올해 2018년은 회사 설립 35주년에다 미주지역 꽃동네 설립 20년, 이사로 재직한 태평양은행 창립 15년, 가주한미포럼을 이끌면서 위안부 운동에 뛰어든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기업가, 사회운동가, 자원봉사자, 은행 이사장 등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그가 덤으로 얻은 나머지 삶도 2세 지도자를 양성하고 투철한 역사교육을 시키는 데 헌신하겠다며 지치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원래 꿈은 외교관
해금강으로 잘 알려진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윤석원 대표는 4세 때 피난길에 나섰다 공산군의 총격에 형들이 모두 사망하고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그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남하하면서 형들의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공산군에 발견되어 총격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늘 회한 속에 산 어머니는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집에 불러 밥을 해주고 옷을 내주는 등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다가 여섯 살 외아들을 홀로 남기고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후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그는 외대 아랍어과에 들어간 뒤 곧 해병대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치고 노스웨스턴 항공사에 1970년 입사한다. 당시 항공사 직원으로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와이 이민국 심사국장의 서울 여행 안내를 정성껏 해 준 것이 계기가 돼 그의 이민 초청으로 1975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자부품 수출회사 설립
“한국에 있는 친구의 권유로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시작하게 됐는데 그것이 미국의 전자부품을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 수출하는 ‘유니크 스펙트로닉스’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오피스도 없이 자신의 집에서 1983년 회사를 창업한 그는 미국의 우수한 전자부품을 한국, 동남아에 수출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래회사의 부품개발에도 공헌하기위해 가전업계 현황과 최신의 부품정보 등을 제공하면서 시장을 계속 확장하게 됐다. 삼성, LG 등 한국 가전회사는 물론 GE, 월풀, 메이텍 등 주요 기업들의 소재, 원자재, 부품의 연구 개발 및 조달까지 영역을 넓힌 결과 2011년 연방 상무부로부터 ‘대통령 수출상’을 수상했고 2015년에는 ‘대통령 최우수 수출상’까지 받았다.
■위안부결의안서 소녀상까지
2007년 7월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의 종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촉구한 결의안(HR 121) 통과를 앞두고 한인사회가 결집해야 한다는 기사를 읽게 된 것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원봉사자가 되어서 매 주말마다 청원서를 받기 위해 마켓 앞에서 한인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을 대상으로 서명 운동에 나섰다. 이때 연방의회에서 증언차 미국을 방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직접 만나 피맺힌 절규를 들으며 한국인으로서 너무 부끄러웠고 피가 거꾸로 솟는 울분을 느껴서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마침내 위안부 결의안 H.R.121의 연방하원 통과 후 그는 후속 사업을 생각하던 중 2008년 위안부 기림비 설립 신청을 위한 단체 이름으로 ‘가주한미포럼’을 등록했고, 이후 6년 간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헌신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까지 기획, 섭외, 재정, 허가, 부지 선정, 운송, 설치, 진행 등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챙긴 그는 “평화의 소녀상은 한인들의 염원, 재능 봉사자들의 협조, 가주한미포럼 회원들의 자원봉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일본계 극우단체가 3년 동안 집요한 소송전을 벌였지만 그들의 완패로 종지부를 찍게된 점도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꽃동네 봉사
중학교 2학년 때 가톨릭에 귀의한 그는 “한국 꽃동네 오웅진 신부의 권유로 미주지역에도 꽃동네를 설립하고 이사를 맡게 됐다”고 전했다. 지난 1998년 LA에 꽃동네가 문을 여는 데 앞장 선 그는 오갈 데 없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남가주 지역 린우드와 테메큘라를 시작으로 뉴저지주와 조지아주, 캐나다 토론토, 그리고 아이티 등에도 꽃동네가 세워지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현재는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남미 국가에도 불우이웃 돕기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2014년초 한국의 위안부 문제에 교황도 관심을 갖고 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을 이메일로 보낸 적이 있는 데 교황으로부터 같이 기도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해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해 음성 꽃동네를 들렀는데 음성 꽃동네에서 교황을 알현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사랑으로 맞아들여 돌보는 일을 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암 투병하며 삶의 의미
윤 대표는 지난 2014년 말 식도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고 소녀상을 만든 것도 힘든데, 은행의 이사장까지 하던 2014년 말 너무 무리했는지 식도암 진단을 받고 절망감에 힘들고 외로웠지만 이젠 수술과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있으며 다시 새로운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생애에 가장 의미 있었던 일로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한 서명운동에서부터 시작해 소녀상 건립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민간 외교관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라며 “덤으로 얻은 나머지 여생도 갈곳 없는 불우이웃을 돕고 일본의 진정성있는 사과를 받아내는 일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위안부 이야기만 들으면 지겹다는 일부 한인들의 소견에 “지난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 학살을 사과하기까지 30여년이 걸렸다”며 “일본 정부로부터 위안부에 대한 공식 사과를 받을 때까지 2세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고 차세대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등 커뮤니티 차원의 풀뿌리 운동은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윤석원회장 약력
-강원도 통천 출생, 70세
-1975년 미국 이민
-1983년 유니크 스펙트로닉스 설립
-1995년 미주꽃동네 설립, 창립이사
-2008년 가주한미포럼 대표
-2011년 미 대통령 수출상 수상
-2012년 태평양은행 이사장 선임
-2015년 미 대통령 최우수 수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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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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