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속적이면서 생활에 불편없게, 전통-현대 낀 세대 맞춤 설계에
▶ 대나무 외장재로 독특한 분위기, ‘품격 있는 할배’ 꿈꾸는 집주인
경남 김해시 여차리의 ‘멋진 할아버지집’은 은퇴 후 멋진 노년 생활을 꿈꾸는 건축주가 오랜 준비 끝에 지은 집이다. <윤준환 건축사진작가 제공>
별채(오른쪽)와 안채를 분리하는 사이 공간을 통해 소나무가 그림처럼 담긴다. 정면에 보이는 지붕 있는 건물은 버려진 컨테이너를 반으로 잘라 만든 정자 겸 전망대다. <윤준환 건축사진작가 제공>
안채 내부. 별채는 전통적인 공간으로 안채는 현대적인 공간으로 시간을 분리했다. 박공지붕 모양의 주방은 예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안주인을 위한 선물이다. <윤준환 건축사진작가 제공>
피아노, 산악자전거, 요리, 권투, 마라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시간이 없다. 직장인의 취미 생활은 결국 ‘은퇴 후’라는 불분명하고 불길한 시간 속으로 밀려 나간다.
올해 경남 김해시 여차리에 지어진 ‘멋진 할아버지집’의 건축주는 무려 40세부터 은퇴 후를 대비했다. 그의 꿈은 “품격 있는 할배”가 되는 것. 언젠가 자녀와 손주들 앞에서 능숙하게 기타를 연주하는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그는 손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맹연습에 들어갔다.
베이비 붐 세대에게 어울리는 집은?
“우리 세대에 행복이나 삶의 질 같은 걸 생각할 수 있었습니까. 그저 먹고 살기 바빴지요.” 남편은 1961년생, 아내는 1962년생인 건축주 부부는 전형적인 베이비붐 세대다. ‘헬조선’의 청년 세대가 삶의 질을 알면서도 가지지 못하는 세대라면, 이들은 삶의 질이 뭔지 글로 배운 세대다. 보험회사 임원까지 지내다가 55세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진 그는 한마디로 “슈퍼맨처럼 살았다”고 말했다.
“경조사는 물론이고 온갖 사람 다 챙기고 모임이란 모임은 빠지지 않았죠. 그렇게 사는 것도 좋긴 한데 마흔 넘어가니까 이러다 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은퇴 후엔 싹 끊고 오로지 내 행복에 집중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취미 찾기를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품격을 중시하는 그에게 나이 들어 서툴게 기타줄 뚱땅거리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평생 할 취미 활동을 미리 찾아놓겠다는 일념으로 점심도 라면으로 때우고 자전거, 수영, 데생 등 온갖 취미에 발을 담근 결과 국선도, 서예, 기타, 그리고 색소폰이 최종 선택됐다. 건축주가 처음 이기철(아키텍 케이) 건축가를 만나 집 설계를 의뢰했을 때, 건축가는 그의 방대한 취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55~65세인 베이비 부머들의 가장 큰 고민이 은퇴 후의 삶일 거예요. 대부분 정신 없이 사시느라 여가에 대한 갈증은 많은데 해소 방법을 모르시죠. 이 집의 건축주는 드물게 열심히 대비를 하신 경우라 다양한 취미 활동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건축가는 땅을 방문했을 때 눈 여겨 본 수백 년 된 소나무를 중심으로 안채와 별채를 나눴다. 거실, 침실이 있는 안채와 취미 활동을 위한 별채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긴 지붕 아래 하나로 연결된다. 두 채 사이에 생긴 지붕 있는 마당엔 소나무가 그림처럼 담긴다. 언젠가 건축주의 기타 실력이 완성될 때 공연장으로 사용될 장소다.
별채와 안채는 각각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고안됐다. 몸은 도시에 있지만 마음은 시골에 머물러 있는 베이비 붐 세대에게 어울리는 건축을 고민하다가 나온 결론이다. “전후 빈곤부터 경제호황, 민주화, 세계화까지, 베이비 부머는 그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한 세대입니다. 현대 문명의 편리함에 익숙하면서도 정서적으론 토속적인 것을 선호하시죠. 건축주 분도 ‘촌집’이란 말을 좋은 의미로 많이 쓰셨는데, 이분들에게 마음으로 기댈 수 있는 고향 같은 집, 그러면서도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현대식 촌집’을 만드는 데 초점을 뒀습니다.”
들쳐진 처마와 툇마루는 해를 막고 걸터앉는 기능 외에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별채에는 한지 창호를 사용해 전통적인 느낌을 한층 강조했다. 은퇴 후에도 새벽 5시면 눈을 뜨는 집주인은 가장 먼저 이곳을 찾는다. 한지문을 모두 닫으면 국선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문을 열면 기타, 벼루, 붓, 색소폰으로 가득 찬 취미실로 변신한다.
국내 대나무 주택 1호… 한옥과는 또 다른 맛
토속과 현대 사이의 치열한 고민은 집 바깥에선 일체 그 낌새를 챌 수 없다. 대나무라는 ‘시대 불명’의 외장재 앞에서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한국 전통미술이나 종교를 통해 친숙한 존재로 자리 잡았지만, 적어도 건축 분야에선 완전히 생소한 자재다. 건축가가 굳이 이 자재를 택한 이유는 집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선비 같은 느낌”을 집으로 구현하고 싶어서다. “어떤 사람이 사는지 연상되는 집이 가장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건축주와 닮은 재료가 뭘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게 대나무입니다. 마침 김해에 대나무가 많이 나길래 콘크리트로 구조를 세우고 대나무를 외장재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잘 쪼개지고 변색하는 성질 탓에 한국 주택에서 대나무를 사용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직접 실험에 나섰다. 대나무 중 가장 굵은 종에 속하는 맹종죽을 구해 온도를 달리해가며 가마에서 구웠다. 대나무를 태우고 터뜨리길 수십 번, 드디어 적절한 강도와 경도를 갖춘 외장용 대나무를 얻을 수 있었다. 푸른 기가 가시고 거무스름하게 탄화된 대나무는 한옥의 전통미와는 또 다른 맛을 낸다. 한국적이면서도 한옥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통과 현대 사이에 낀 베이비 붐 세대와 가장 닮은 재료라고 할 수도 있다.
건축가는 안채와 별채를 만들고 남는 북쪽 마당에 땅을 높이 돋워 작은 채 하나를 더 만들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를 반으로 자르고 대나무를 붙여 만든 이 곳은 정자, 전망대, 창고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진짜 용도는 ‘뱃머리’다. 해양대를 나와 한때 항해사를 꿈꿨던 건축주에게 선박의 머리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풍경을 선물하기 위해 추가로 만든 곳이다.
40세부터 거의 15년을 준비해온 꿈의 공간에서 건축주는 멋진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매일같이 맹연습 중이다. 그는 “혼자 놀 줄 알아야 진정한 고수”라고 말한다. “은퇴한 선배들이 귀촌했다가 시골 생활에 적응 못하고 5년 만에 돌아오는 걸 많이 봤습니다. 은퇴하고 촌에 묻힐 생각만 하지 그 후에 다른 차원의 생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나이가 들수록 혼자 즐길거리가 많아야 합니다. 그것도 대충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잘 해야죠. 그게 할배의 품격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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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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