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실 자리엔 주방이 있고, 거실 겸 서재는 두계단 아래에 1.5층 높이 서가엔 구름다리
▶ 나주시‘적당과 작당의 집’
전남 나주시‘적당과 작당의 집’. 서울에서 일하다가 나주혁신도시 조성으로 내려오게 된 4인 가족의 집이다. 집 이름은 적당히 행복하면서 재미있는 일을 작당할 수 있는 집을 꿈꾸며 남편이 지은 것이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서재 구름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거실. 참호처럼 지면보다 약간 낮게 설계해 주변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1970년대 도입된 국민주택은 전용면적 85㎡(약 25.7평)에 거실 1개, 방 2,3개로 구성됐다. 당시 정권이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집의 표준을 제시한 것이다.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정권도, 가족의 형태도, 인간다움의 기준도 바뀌었다. 전남 나주시 ‘적당과 작당의 집’은 핵가족과 1인 가구, 딩크족들 사이에서 고전처럼 남은 4인 가족에게 적당한 집을 다시 묻는다.
참호 같은 거실, 서재 앞 구름다리
건축주는 2014년 나주혁신도시 조성에 따라 공기업들이 대거 이전하면서 서울을 떠나게 된 젊은 부부들 중 하나다. 에너지 넘치는 6세 딸과 1분에 한번씩 “사랑해요”를 남발하는 4세 아들, 네 가족은 언젠가 이루기로 약속한 집 짓기의 꿈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연애할 때부터 같이 살 집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릴 때 종이 박스나 판자를 쌓고 거기 끼어 앉아 키득거렸던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때 느꼈던 정서를 생활로 이어갈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집을 짓기도 전에 정해온 ‘적당과 작당의 집’이란 이름에서, 건축가들은 네 가족을 감싼 밝은 기운을 금세 눈치챘다. 설계를 맡은 노은주ㆍ임형남(가온건축) 건축가 부부는 충남 ‘금산주택’을 비롯해 주택 작업만 100채 가까이 해온 프로들이다. “많은 건축주 자녀들을 봤지만 이 아이들은 정말 에너지가 최고였어요(웃음).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남편과 늘 웃는 얼굴의 아내까지, 이 가족에겐 동화 같은 집이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박공지붕은 단란한 가족의 상징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칫 식상해보일 수 있다. 건축가들은 어설프게 진부함을 피하느니 아예 적극적으로 쓰자는 생각에 정면, 측면, 배면 여러 곳에 박공지붕을 만들었다. 옛 가정의 화목함을 패러디한 듯한 장난스러움은 집 주인의 유쾌함과도 꼭 닮았다.
내부로 들어가면 전통적인 느낌은 반전된다. 넓은 거실이 있을 거라 예상한 곳엔 주방이 있고, 그 옆으로 지면에서 두 계단 내려간 곳에 아늑한 거실이 펼쳐져 있다. 건축가들은 “요즘 거실의 의미가 크게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거실은 대청이 실내로 들어오면서 생긴 공간입니다. 제사를 지내거나 집들이를 하거나 같이 TV를 보는 등 주로 어른들이 모이는 장소였죠. 그런데 요즘은 이런 행사들이 거의 사라지면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떡 벌어진 거실이 필요 없어졌어요. 최근 몇 년 간 거실이 없어도 된다는 건축주들을 꽤 많이 봤습니다.”
주방은 요리를 하고 밥을 먹는 실용적 공간, 거실은 서재를 겸한 네 가족의 온전한 휴식 처다. 참호처럼 땅에서 약간 내려앉은 거실은 가족들이 거기서 눕든 구르든 바깥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한쪽 벽을 따라 짠 서가와 남향 볕을 가득 들이는 거대한 창문은 집주인이 말했던 ‘작당’을 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1.5층 높이의 서가 한가운데는 ‘구름다리’가 있다. 손이 닿지 않는 위쪽 서가의 책을 꺼낼 수 있는 구조물이기도 하고, 올라가면 괜히 신나는 실내 전망대이기도 하다.
부부가 “1호”라고 부르는 첫째 딸은 계단 아래 이미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했다. 작은 책상을 야무지게 놓고 혹시라도 동생이 차지할까 봐 부재 시엔 자기 몸집만한 인형을 앉혀 둔다. 남편은 “아이에게 그런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집을 지은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집 한 가운데서 길을 잃다
작당은 2층에서도 이어진다. 부부침실과 아이들 방 외에 손님방으로 만든 다락이다. 재미있는 건 위로 올라가는 다락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다락이라는 것. 원래 1층 지붕 아래 남은 공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바닥을 낮춰서 다락으로 만든 것이다.
“아래층은 화장실이라 천장이 좀 낮아도 되거든요. “다락은 늘 집 짓는 사람들의 로망이잖아요. 비올 땐 빗소리도 들을 수 있고 천장으로 별도 보이고요. 그리고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혹시 독립된 공간을 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명색은 손님방이지만 가장 자주 쓰는 건 역시 아이들이다. 지붕의 가파른 기울기가 자아내는 설렘, 그리고 무엇보다 내려가는 다락이라는 사실에 매료돼 아이들은 매일같이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한다. 아내는 “애들이 요새 ‘초대 병’에 걸려 큰 일”이라며 “아이 친구들이 놀러 와 집 안에서 길을 잃는다”고 말했다. 화장실, 욕조, 세면대가 각자 분리된 구조나 거실의 구름다리 등 정형화된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남의 집에 가도 금방 화장실을 찾아요. 집들이 다 비슷하니까요. 학교까지 획일화돼 있으니 아이들이 색다른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경험치가 너무 적어요. 건축이 형태나 재료로서도 독특한 경험을 줄 수 있지만 저는 공간을 통한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치 우리가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듯이, 그런 경험을 집 안에서도 해봐야 해요.”
길을 잃는 것은 누군가에겐 불안이지만 누군가에겐 기대다. 살 던 곳을 떠나 연고 없는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 가족에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다. 오래 전 국가공인 표준이었던 4인 가족은 이제 자신들만의 적당함을 스스로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저희가 생각한 적당함이란 과하게 행복할 필요도 없고 과하게 위축될 필요도 없이, 지금 적당히 즐겁게 살자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실천에 옮긴 결과물이 이 집이에요. 우리만의 아지트에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재미있는 일을 작당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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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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