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졸업 후에 평소 하고 싶었던 식물 분류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수목원의 연구 조교가 되어 몇 년 동안 전국의 산야를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아마도 타고 난 기억력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학교가 멀리 떨어저 있어 기차 통학을 하였는데, 차안에서 심심풀이로 식물 도감을 뒤적거리다가 많은 식물명을 암기하고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년전 IT 분야의 직장에서 평생을 일하다가 은퇴하고 나서 이것 저것 동양 고전을 살펴 보다가 노자 도덕경의 '名可名 非常名' 이란 귀절을 대하며, 분류학의 이론적 토대가 존재론적 시각으로 볼 때 허약함을 알게 되었다. 세상 만물이 항상 물처럼 흐르고 변하며, 명확하게 구분될 수가 없는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라고 생각 한다면, 인위적으로 끊고, 분할하고, 울타리를 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엄밀히 보아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리 자생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적송(赤松)은, 세계 식물 명명 규약인 이명법에 따라 ‘Pinus densiflora Siebold et Zuccarini’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이 소나무와 더불어 생활해 왔지만, 잘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나무의 이름을 사용함에 있어 큰 혼동을 빚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소나무’란 이 현실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오직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적인 개념일 뿐이다. 이에 반해 애국가 속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이 허구적 소나무의Definition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재적, 현상의 세계 속에서 구현하는, 또는 Incarnate하는 하나의 Instance 또는 Occurrence에 불과하다. 즉 전자는 실체가 없는 Logical 한 보통명사 ‘소나무’ 이고 후자는 실체를 가진 Physical 한 고유명사 ‘소나무’ 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구분은 바로 IT의 Object-Oriented Technology에서 말하는 'Class' 와 'Object'의 구분이고 Relational Database에서 말하는 'One-to-Many' 의 Cardinality 관계이다. IT 전문가들은 어떤 앱(Application)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놓은 Class를 불러와 그Attributes에 Value를 정해주는 방식으로 Objects을 만드는 작업부터 우선 시작하는데, 흔히들 'Logical한 Class에 육체를 입힌다'고 표현한다. 그 반대로 ‘Class-ification’이란 현실 세계의 Objects 또는 Data를 어떤 목적과 기준에 따라 Sort out해서 체계적으로 이 허구의 Class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식물 분류학을 ‘Plant Taxonomy’, 또는 ‘Plant Class-ification’ 이라고 부른다.
소나무 이름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하느냐 하면, 이 허구적 소나무와 실재적 소나무의 구분이 바로 서양 정신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Platon의 Idea 철학을 아주 간결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객관적이고 영원불멸한 사물의 본질을 ‘이데아’라 칭했다. 플라톤은 감각으로 경험하는 것은 존재의 진짜 모습이 아니며 진짜는 관념(이데아) 속에서만 존재하고, 오직 순수이성으로만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우리의 사유 체제는 이 Platon 철학 속에서 형성되어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세상만사를 이런 식으로만 재단 하려 하지,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나의 프랑스 유학시절 은사이셨던 Michel Godron 교수(생태학, 은퇴, 파리 대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노자 도덕경 첫 장에 나오는 아래의 귀절들에서, ‘無名’과 ‘有名’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느냐”는 내용이었다. 서구 언어에 익숙한 나에게, Ideogram인 중국어는 참으로 황당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Invocation power가 신통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한 마디 툭 던지는 Style이니,그 의미는 결국 이것 저것 살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자의 몫이다. .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최진석(철학 교수, 서강대)은 2014년에 쓴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에서 “첫 두 글자를 한 단어로 해서 ‘無名’ 또는 ‘有名’으로 읽지 말고, 따로 떼어서, 無나 有 한 글자 만을 주어로 삼고, 名은 동사로, 나머지는 목적어 또는 보어로 읽을 것”을 주문한다. 그의 주문에 따라 은사님께도 “‘無, 名 天地之始’ 그리고 ‘有, 名 萬物之母’로 읽으시라”라고 말씀드렸다.
노자 철학의 학문적 관심은, 이 세상은 이미 창조되어 현실 속에서 그들 앞에 펼쳐져 전개되어 있으므로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나’ 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느냐’ 에 있었던 것 같다 (최진석, 2014). 그래서 나는 ‘無’는 天地之始, 즉 우주만물이 형성되기 전의Architecture Plan을 말하고, ‘有’는 萬物之母, 즉 이 Plan에 따라서 만들어진 실재적인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싶다. Platon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無’는 눈에 보이지 않는 Logical 한 허구적 Idea의 세계이고, ‘有’는 감각적 현상의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Physical 한 세계를 뜻한다.
그러니까, IT worker가 Class(無)에서 Objects(有)를 자유자재로 만들어내고, 건축 업자들이 하나의 청사진(無)에서 조금씩 다른 집(有)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내며, 길거리의 붕어빵 장사가 붕어빵 틀(無)에서 비슷비슷한 붕어빵(有)들을 원하는 대로 구워내는 식이다. 그 반대로 인상파 화가들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아름다움(無)을 그리려 하기보다는 화가가 현장에서 자기의 관점에서 직접보고, 느끼고 하는 Objects의 실재적인 것(有)들을 화폭에 담으려 하였다.
그런데 최진석 교수는 Platon 철학의 기본 Framework 속에 노자 철학을 구겨 넣어서 생각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자의 無와 有를 존재적 위상에 차등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즉 無에서 有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적으로 본다면,無가 有의 존재 근거 혹은 발생 근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에서는 無가 有에 기대어 있듯이 有도 無에 기대어 있습니다.상호 의존하며 기대어서 만물을 이루게 한다는 것, 즉 有無相生이 노자 철학의 기본 구도입니다. 물론 매우 다르지만, 억지로 플라톤의 철학과 유비 시킨다면, 無와 有가 상호 의존해 있는 형식 자체가 "이데아"에 해당하고 만물이 "Phenomenon"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구조를 견강부회(牽强附會) 식으로 유비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有無相生’의 의미는 서구 언어로 표현하면 Relativity라고 생각 되는데 , ‘The contraries help each other to exist’ 나, ‘Les contraires se complètent’ 라는 불어 표현이 이해를 좀 더 쉽게 한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 있어, 액설레이터만 밟을 수는 없고 브레이크도 상호 의존적으로 밟아 주어야 자동차 운행이 가능하다는 원리이다. 음악에서 아름다운 소리는 음표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표와 음표 사이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같은 맥락이다. 즉, 옆에 것과의 관계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 진다는 의미이다. 최진석 교수는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가지 입장, 즉, 밝을 ‘明’과 같은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라고 강조 한다. ‘明’은 서로 대조되는 해와 달 (日+月), 두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Godron 교수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성경의 요한복음(Evangile selon Jean) 첫 몇 줄을 읽어 보라”는 내용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Au commencement tait la Parole)…”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 났고(Toutes choses furent faites par elle)…” 그런데, 여기서 ‘말씀(Parole)’ 이란, 희랍어의 ‘Logos’가 그렇게 번역된 것이라 한다. ‘둘(Dia)이 대화(Logue)한다’ 는 뜻의 ‘Dia-Logue’에서 Logue는 Logos이다. 그리고 이 Logos에는 Logic이란 뜻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란, 노자의 ‘天地之始’, 또는 Platon의 ‘Idea’의 세계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 나름대로 생각하고 느낀 점들을, ‘노느니 염불 한다’는 식으로 그냥 써 보았다. 보통 사람들이 읽고서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고 느낀다면, 나로서는 보람 있는 일이다. 이제 사회의 주류에서 off-line 된 나에게는 앞으로 이루어야 할 성공에 대한 걱정이 없어 마음이 가뿐하다. 그저 Puzzle을 맞추듯 하나 하나 자유롭게 생각하며 끼워 맞춰 가는 과정을 즐기고 싶다. 일찌감치 은퇴할걸, 무엇하느라 남의 심기를 그렇게도 살피며 긴장된 나날을 보냈는지, 지난날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나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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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굉, 산림생태학자/웃브리지,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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