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한국 방문 기간 중 가을바람이 제법 차갑던 11월 어느 날 찾은 경주 양동마을은 인기척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양동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양반마을로 지난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후손들이 살면서 500년 이상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씨족마을이다. 야트막한 구릉지에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조화를 이룬 채 가지런히 들어앉아 있는 형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안겨준다. 평일 아침인데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방문객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아 이곳이 관광지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마을을 돌아볼 수 있었다.
멀리 안강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은 대부분 지체 높은 양반들의 기와집 차지다. 가옥들을 둘러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대문 옆에 낮게 세워진 굴뚝이었다. 높이는 어린아이 키 정도로 채 1m가 안 돼 보였다.
마을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으로는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만든 것이 낮은 굴뚝이라는 것이다. 행여 높이 솟아오르는 양반집 굴뚝 연기를 보며 인근의 가난한 평민들이 더 배고파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낮게 퍼지기 때문에 집안사람들로서는 아주 불편하다. 그럼에도 양반 댁들은 보릿고개나 흉년이 찾아오면 굳이 낮은 굴뚝에 불을 땠다. 물론 풍년이 들고 모든 이의 소출이 많은 해에는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났다. 낮은 굴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고 박탈감을 덜 안겨주려는 배려의 산물이었다.
이런 배려심을 갖고 있는 양반들의 행동이 낮은 굴뚝에만 그칠 리는 없는 법. 이런 양반 가문들은 추수 때가 되면 평민들이 소출을 집어 갈 수 있도록 추수한 작물을 일부러 오래 야적해 놓기도 했다. 가진 자들의 도덕적 책무를 의미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실천해 온 것이다.
그런데 신분사회를 벗어난 요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 느낌이다. ‘드러내기’와 ‘구분하기’가 지상목표가 된 듯한 현대사회에서 낮은 굴뚝의 의미는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소비경쟁에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에게 절제와 검소, 그리고 배려의 교훈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몇 달 전 재벌가의 위선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큰 인기를 모았던 한 드라마의 작가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취재하면서 드라마보다 더 충격적인 현실에 놀랐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불행하게도 내가 취재한 사람 중에는 돈을 제대로 쓰는, 아름다운 자본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사실 단 한 명도 없었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표본이었다”고 꼬집었다.
작가의 결론이 지나친 일반화일 수는 있지만, 없는 사람들 마음 다칠까봐 매운 연기를 감수하면서 낮은 굴뚝에 불을 피웠던 조상들의 고귀한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몇 년 전 한국에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일부 부유계층 사이에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배우기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인문학 선생을 대동하고 이탈리아를 직접 찾은 재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메디치 가문 배우기를 통해 한국의 부자들이 달라졌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배운답시고 아까운 시간 내고 비싼 돈 들이면서 이탈리아까지 날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유서 깊은 양반 고택들에 남아 있는 낮은 굴뚝만 돌아봐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낮은 굴뚝은 비단 부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꼭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아픈 사람 앞에서 건강을 자랑하고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사람 앞에서 자식자랑을 늘어놓는다면, 굶주리는 이웃은 아랑곳 않은 채 높은 굴뚝에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잘 보존된 마을의 외관이 아니라 낮은 굴뚝이 상징하는 배려의 정신이야말로 경주 양동마을의 진정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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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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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3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본주의? 그런것도 있나요? 상반된 개념인것 같은데.
양반들이 낮은 굴뚝을 이용한게 무슨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인가요? 양반은 지배계급이었고 왜곡된 지배구조로 평민을 착취하면서 호위호식하던 사람들인데 흉년에 자기만 호위호식하다가 민란이 일어나는게 두려워서 눈가리고 아웅 한것이지요.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걸 하려면 흉년에 곡간문을 열고 규휼을 해야 하겠지요. 조선시대 양반이라는제도가 어떤제도인지 생각해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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