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 환자와 마지막 고별인사를 마치고 나와 바라 본 하늘은 평소보다 푸르고 깊어 보였다. 허탈하게 내뿜은 한숨속의 증기와 눈가에 고인 물기 탓일까. 안경 넘어 시야가 흐려진다.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싶은 것이 의사의 본능인데 생명을 마감시키고 나왔으니…
이 환자와의 첫 만남은 35년 전 그가 교통사고를 당해 급성 뇌경막하 출혈로 혼미 상태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다행히 빠른 수술과 3주간의 중환자실 치료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를 퇴원시킨 토요일 오후 아내와 외출 후 집에 들어서는데 정원 앞쪽에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는 그가 보였다. 가랑비가 오는데 그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아니 뭘 하십니까?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놀라서 묻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눈도 안 맞추고 멋쩍은 듯 작게 대답했다. “주소는 교회를 통해 알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데 지금 가진 것은 정원사 기술 밖에 없어 퇴원하자마자 바로 왔습니다”
당시 갓 LA로 이민 와 의료보험도 없이 경제적으로 힘들어 무료 치료해준 것을 인연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35년간 우리 집의 정원사가 되었다. 그 35년 동안 오피스의 파킹랏 청소와 화단 가꾸기를 매주 무료로 보아 준 것에 더해 우리 집의 힘든 일엔 만사 제치고 달려와 도와주었다. 가끔 있는 환자에 대한 작은 배려가 이렇게 오래 지속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당시 13만 달러에 달했던 병원비를 그는 7년에 걸쳐 땀 흘려 정원사 일로 번 돈으로 매달 꼬박 꼬박 다 갚았다. 파산 선고나 허위서류로 메디칼에 병원 빚을 넘겨 버리라는 주의의 권유를 마다하고 그는 의료비용을 갚겠다는 입원 시의 약속을 ‘생명을 구해준 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지킨 것이다. 이런 삶의 자세를 옆에서 지켜 본 35년간이 나에게는 상자 속에 숨겨 져 있던 보석의 귀중하고 빛나는 아름다움을 본 경의의 시간이었다.
그는 “정직은 외로운 섬, 진실은 젖지 않는 고독”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5년 전 폐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의연하게 투병하며 성실하게 일을 계속했던 그는 얼마 전 심폐 기능의 마비로 입원하기 전날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했다고 한다.
폐암이 가슴에 다 퍼졌고 뇌는 손상을 입었으며 혈압은 약품으로만 유지한 상태로 그는 중환자실에 누어있었다. 생명보조 장치를 제거하자는 병원측의 권유를 가족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헤아려 진다.
그러나 난 주치의로서, 아니 그의 진실 된 삶의 시간을 공유한 한 이웃으로서, 그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로서도 이웃으로서도 힘든 결정이었다. 한 순간 피해 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난 그를 위해서 보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가족과 친지들, 의료진과 소셜워커, 그의 목사님까지 모여 회의를 갖고 충분히 설명하며 이해와 동의를 구했다. 가족들이 마음을 정한 후 우리는 그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그는 질병도, 아픔과 괴로움도 없는, 항암치료도 필요 없고, 추운겨울 바람도, 손볼 정원도 없는 평화로운 푸른 초장으로 떠났다.
앞으로는 일찍 오피스에 나가도 먼지제거기의 모터 소음 속에서 땀 흘려 일하던 그의 해맑은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성실하고 정직했던, 섣부른 자만에 때 타지 않았던 그의 순수함은 내 가슴 속 한편을 언제나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의 35년간 수고와 그의 충만한 삶을 볼 수 있었던 것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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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청원/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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