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 8년전 이곳에서 특파원으로 있다 한국나간 친구로부터 무협지 한질을 선물받은 적이 있었다. 이름하여 소오강호(笑傲江湖). 김용이라는 작가가 집필한 무협소설인데 꽤 볼만하다며 권하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협소설은 청소년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스쳐가는 재미있는 소설이기는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그 친구의 경우 대학시절에 심심풀이로 읽다가 빠져 든 것이 문제였던 같다. 그의 말처럼 소설은 그리 재미있는 것도, 깊이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기저기서 말도 안되는 단편적인 지식들을 짜깁기, 협객의 길이니 무예의 길이니하며 펼쳐지는 이야기가 여간 어지러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동방불패’라는 인물이었다. 사실 ‘동방불패’ 라는 인물은 소설 속에서보다는 ‘소오강호’ 를 읽는 도중 어떤 친구로부터 ‘동방불패’라는 영화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알게된 인물이었다.(1992년 이연걸, 임청하 주연으로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동방불패’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유닉(eunuch- 중성)으로서, 소설 속에서는 잠깐 등장하다 말며 주인공과도 큰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은 소설과는 조금 다르게 거세된 남성이 점차 중성화되어가다가 종막에는 여성이 되어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짜여졌다. 당시 한국 팬들은 무공이 특출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무공연마를 위해 스스로 거세한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녀(?)의 중성적인 매력에 빠져 열광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한 것은 (왜 홍콩의 영화제작사들이 이 동방불패의 캐릭터에 주목하게 되었나, 또 어떻게) 한국 등지에서 그같은 영화가 히트하게 되었나 등의 배경이었다.
남성의 여성화(?)는 TV 등 비주얼 시대의 트렌드이기는 하겠지만 ‘동방불패’의 경우 그런 트렌드하고는 관련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것은 영화의 내용이 (베이징 오페라를 다룬) ‘패왕별희’처럼 남성이 여성화되고자 하는, 즉 동성애내지 여성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거세된 자의 숙명,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절대 환경을 내용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된 남자가 맞닥치게 되는 아이러니,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다가올 때 그 운명적인 사랑은 어떻게 결말을 내리게 될까? 묘한 흥분을 자극하는 플롯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남성은 중성적인 캐릭터에 약하다’ 이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들은 대체로 터프한 여성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터프한 여성이란 남성 세계, 즉 이상과 포부, 야망 등을 이해하는, 또 그것과 닮은꼴의 여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 즉 남녀사이의 연애따위의 가치관을 공감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말한다 할 것이다. 흔히 여성은 연애를 위한 연애를, 남성은 성적인 욕망을 위해 연애를 한다지만 이것은 어느정도 맞고 어느정도 틀린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남성들도 정복당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남성들에게도 유약한 면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남성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빼앗긴 모성애랄까, 사랑의 상실감이랄까, 모든 남성들은 본질적으로 여성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하는 애정결핍의 걸인들이기도 하다.
괴테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등이 모두 이러한 콤플렉스가 작용한 작품들이다. - 순결한 사랑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 베토벤의 말이기도 하다. 남성들이 이처럼 꿈꾸는 사랑을 간직한데 반해 여성들은 보다 현실적이다. 여성들은 남성들 보다 자신을 받아(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하다.
반면 남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드는 (맹목적인) 불나방들이다. 동방불패는 신과 인간 사이, 성과 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들(의 환상)이 탄생시킨 괴물이겠지만 그것은 또 점차 진화하고 있는 페미니즘(성의 평등화)시대와 그 속에서 표출된 거세의 공포, 성의 심리학적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방불패’는 여성도 남성도 아니지만 실제는 여성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그녀가 사랑을 아는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에게 사랑이란 오직 깨져버릴 그릇보다도 못한 존재였지만 그것이 사랑이었기 때문에 동방불패는 위험한 불 속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고 또 그 가련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절세의 무공을 사용하고 또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찢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서, 신에 버금가는 무예의 달인으로서, 강호를 버리고 (불가능한)사랑을 택할 수 밖에 없는 비애의 주인공. 그녀의 박력있으면서도 사랑을 위해 죽을 줄 아는 그 불나방같은 여신적(?) 매력은 뭇 남성들의 동경의 대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남성들의 잠재의식 속에나 존재하는) 무협소설의 이야기일 뿐이다.
<
이정훈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