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색 물풀 반죽 ‘슬라임’, 조몰락거리며 욕구 해소
▶ 공방서 가구·옷 등 직접 제작, 디지털시대 역주행 행복 체험
“손은 밖으로 노출된 뇌”라고 철학자 칸트는 말했다. 부지런한 손노동은 뇌를 깨운다. 나무 공예는 적극적으로 손을 쓰는 방법이다. 서울 망원동 목가구공방 이룸의 가구 만들기 수업. 못생긴 나무가 단정한 가구로 다시 태어나는 건 누군가의 손끝에서다. <이룸 공방 제공>
‘메이커스: 어른의 과학’의 조립식 키트로 플라네타리움을 만드는 과정. <동아시아 제공>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의 좁은 틈새에 갇힌 당신.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98세의 이탈리아 할머니 마리아 단투오모는 ‘뜨개질’을 했다.
이탈리아 중부 템페라시는 2009년 강진으로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30여시간 만에 꽤 건강한 상태로 구조된 마리아 할머니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까?” “코바늘 뜨기를 하느라 정신 없었다네!”
할머니의 몸과 마음을 지켜 준 건 ‘손’이었다. 대바늘로 털실을 엮으며 손을 쓴 행위가 뇌를 깨우고 긴장을 풀어 줬다. 허버트 벤슨 미국 하버드대학 의대 교수는 저서 ‘긴장 완화 반응’(2005)에서 “뜨개질은 혈압을 낮추고 신체를 이완시킨다. 요가, 명상, 기 수련과 효과가 같다”고 썼다. 그레타 가르보, 조앤 크로포드, 세라 제시카 파커, 줄리아 로버츠도 스타로 사는 스트레스를 뜨개질로 해소했다.
털실 가게로 달려갈 필요는 없다. 손 쓸 곳은 많다. 스마트폰으로 의식주가 해결되는 디지털 시대, 필요한 모든 것이 공장에서 나오는 대량생산 시대가 손의 기능을 잠시 끄게 했을 뿐.
손을 써서 행복한 사람들
한창 유행인 어른들의 장난감, 슬라임. ‘끈적끈적한 물질, 점액’이라는 ‘Slime’의 뜻처럼 몰캉몰캉하고 찐득찐득한 색색의 물풀 반죽 덩어리다. 고무 찰흙의 부드러운 버전, 혹은 30ㆍ40대라면 알 법한 고무 만득이의 세련된 버전이다. 올 여름 가수 아이유가 갖고 노는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후 국민 장난감이 됐다. 사용법은 내키는 대로 조몰락거리기. 소리가 나지 않고 ‘꿈처럼’ 폭신하다. 마구 만지다 보면,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세상에 간신히 반응을 보내는 신생아로 돌아간 듯 평온해진다.
“재미로 동영상을 올렸다 수요가 많아 제조업체를 차렸다. 20ㆍ30대 여성이 주로 산다. 촉감이 마시멜로우 같은 버터슬라임이 제일 잘 팔린다. 가격은 한 개에 5,000~7,000원 정도다. 뭐라도 만지고 싶은 욕구를 기분 좋게 풀어주는 게 슬라임의 매력이다.”(‘슬라임 코리아’ 임새미 대표) 딱딱한 스마트폰 액정과 컴퓨터 키보드에 지친 손이 스킨십을 그리워했다는 뜻이다.
좀 더 거칠게 손을 쓰는 법은 공작이다. 가구, 가방, 그릇, 옷, 액세서리까지, 직접 만드는 공방이 전성시대를 맞았다. 서울 망원동 목가구공방 ‘이룸’ 이지훈 대표의 얘기. 그는 정보통신(IT) 분야에서 손 노동자로 전직한 케이스다. “공예는 비경제적이다. 효용만 생각하면 대량생산품을 사는 게 낫다.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지루하고 고되다.” 12주짜리 입문 코스 수업료와 재료비는 60만원이고, TV 선반 정도 만들 수 있다. 가격만 따지면 1만4,000원짜리 이케아 TV 선반 40개를 사고도 남는 비용이다. “손을 쓰는 것의 의미는 과정에 있다. 공방은 체험과 성취감에 목마른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내 손에서 뭔가 만들어지는 경험은 언제나 놀랍다.”
몇 년 전부터 컬러링 북과 필사 책이 뜨더니, 손으로 읽는 잡지까지 나왔다. 일본 밀리언 셀러 무크지 ‘대인의 과학’의 한국판 ‘메이커스: 어른의 과학’(동아시아). 9월 나온 창간호는 플라네타리움(천체 투영기)을 만드는 조립식 키트다. 4만8,000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 플라네타리움이라는 생소한 이름에도 수천 부가 팔렸다. 30~50대 남성이 많이 샀다. 본드 냄새 나는 프라모델의 아련한 향수 때문일까. 다음 호는 플라스틱 아날로그 카메라, 구텐베르크 식 활자 인쇄기 등이 될 것이라고 한다. 왜 ‘손으로 하는 과학’일까. 손과 뇌는 상호 작용하는 관계라는 것, 손 노동은 지식 노동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이 조립식 잡지가 일러주는 메시지다.
손 노동은 고귀하다
가녀리고 가녀린 옥 같은 손, 섬섬옥수. 고운 손이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던 건, 몸 쓰는 노동을 천시한 시대의 얘기였다. 손 근육 단련할 일이 별로 없는 지금, 모두의 손이 섬섬옥수가 됐다. 그래서 더 행복해졌나. 아니라고 말하는, 손 쓰기의 위대함을 간증하는 책과 자료가 넘친다.
“손으로 뇌를 깨울 수 있다. 손과 연계된 뇌세포가 많기 때문에 손을 자주 쓰면 뇌가 부지런해진다. 특히 기억력과 사고력을 주관하는 전두엽이 활성화한다. 손은 뇌의 명령을 수행하는 운동기관이자, 뇌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기관이다.”(구보타 기소우의 ‘손과 뇌’(바다출판사)) “손의 발달이야말로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었다. 손은 육체의 부속물이 아닌 정신의 도구다. 손은 두뇌와 밀접한 순환고리로 연결돼 조종되는 해부학적 걸작품이다.”(마틴 바인만의 ‘손이 지배하는 세상’(해바라기)) 어머니, 아버지의 악력기와 손지압기 사랑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얘기다. 악력이 셀수록 노년에 건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의사협회가 하와이의 일본계 남성 8,006명을 추적했더니, ▦85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 ▦생존했지만 아프거나 자유롭게 거동하지 못하는 사람 ▦85세 이전에 사망한 사람 순으로 악력이 떨어졌다.
미국 시카고대학 정치철학 박사인 매슈 B 크로포드는 워싱턴 싱크탱크 소장이라는 탄탄한 직함을 버리고 모터사이클 정비사가 됐다. 육체 노동자로 사는 풍요로움을 증언한 책 ‘손으로, 생각하기’(사이)에서 그는 손 쓰기의 즐거움을 ‘스스로 유용한 존재가 되는 즐거움’이라 정의했다. “육체 노동은 세상과의 지적 교류다. 몸과 손을 써 무언가 시작하는 순간, 생각이 훨씬 창의적이 된다. 우리는 넥타이를 맨, 스마트폰의 노예다. 그러나 인터넷은 집의 못 하나 박아 주지 않는다. 우리를 위협하는 인공지능(AI)에 없는 것, 바로 손 기술이다.”
태평양 건너 먼 나라만의 얘기도 아니다. 20대인 소영(필명)씨는 돈 버는 기계 같은 삶이 싫어 패션 대기업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인형, 가방, 목도리, 컵 받침, 북커버, 손거울, 실내화, 나무 칼까지, 예쁜 물건을 꼼지락꼼지락 만드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 과정을 담은 웹툰이 대박이 나 스타 작가가 됐다. 지난해부터 네이버에 올린 웹툰을 모아 책 ‘오늘도 핸드메이드!’(비아북)를 냈다. “핸드메이드라는 게 비주류 소재라 이렇게 관심을 받을지 몰랐다. 손으로 뭘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그 만큼 많다는 뜻 아닐까. 거창하게 시작하려 하지 말고 집에 있는 작은 재료로 소소하게 시작하길 권한다.” 소영 작가의 성공은 누가 만든 제품을 구입하는 ‘메이드’가 아닌, 직접 만들어 쓰는 ‘핸드 메이크’의 시대를 예고한다. 그러니, 늦기 전에 손을 쓰자. 그럴 듯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해도 괜찮다. 몰입의 쾌락이 충분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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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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