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이 고른 쌀로 밥 짓는 식당, 103종 소량생산 농가 등 밥맛에 대한 관심 높아져
▶ 요리사들 모여 품종 따져 보니, 밥맛은 비슷… 개성은 다소 차이
지난달 13일 지리산 자락 ‘맛있는 부엌’을 찾아갔다. 이 부엌은 먹고사는 일에 관심 많은 보통 사람이 새로운 식생활과 삶의 관점을 만나게 하는 곳이다.
대표 고은정씨는 이곳에서 밥에 대해 낯선, 그러나 익숙한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고은정의 제철음식학교’를 분기마다 열고, 서울에서도 하루 일정으로 ‘밥짓는 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의 ‘학생’들은 대단한 만한전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호박된장국, 고들빼기김치, 우엉밥 등 가장 흔해서 가치가 가려지기 쉬운 음식을 다시 올바르게 배운다. 그는 자칭 ‘밥 잘 짓는 여자’다. “밥상에서 밥은 자연의 땅과 같은 존재이며 맵고 달고 시고 짠 온갖 맛들을 둥글게 조화시킨다. 이전엔 제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우리는 음식을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밥을 정작 빼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지 7년이 넘었는데, 처음엔 당연히 ‘밥을 왜 배워야 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밥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 대표는 지난 20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 그릇에 담다’ 행사에서도 쌀밥을 지었다. 매달 식재료를 하나씩 탐구하는 ‘푸드 쇼’ 성격의 이날 행사는 여지없이 만석이었다.
경기 고양시 ‘우보농장’ 이근이 대표는 9,917㎡(3,000평) 땅에서 토종 벼 103종을 재배하는 다품종소량 생산 농부다. 토종 벼는 개성이 강하고 시장에서 유의미한 수요가 거의 없는 작물이다. 그는 “일제시대를 거치며 토종 벼의 명맥이 끊겼다. 5,000년 밥 역사가 단절된 것이다”고 설명한다. 토종 벼 농사는 식탁의 주인인 쌀을 보존해 식생활 역사를 다시 잇는 작업인 셈이다. 그의 토종 벼는 자연 농법에 관심 많은 도시 농부와 그들을 지지하는 소비자 사이에서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다. “‘졸장벼’는 키가 아주 작지만 낱알이 촘촘히 붙어 졸장부를 연상시킨다. ‘버들벼’는 이삭이 능수버들처럼 크게 자라 휘어진다.” 농부의 입맛, 마을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지역마다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토종 벼는 각각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2, 3년 사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도 꽤 늘었다는 것이 이씨의 체감이다. 이 대표는 지난 1일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주최한 ‘토종쌀 테이스팅 테이블’에서 제각각 사연이 짙은 ‘대관도’ ‘대춘도’ ‘북흑조’ ‘화도’ 등 토종 쌀 맛을 선보였다.
서울 인사동에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인사1길’의 식당 ‘행복한상’은 쌀을 골라야 밥을 주는 희한한 식당이다. “식당은 죄다 밥집이라 부르면서, 밥은 그저 주인 마음대로 지어 내놓는 요즘 인정에 딴지 좀 걸어 보겠다”는 시도다. 커피 원두 고르듯, 포도 품종 따라 와인 고르듯, 먹고 싶은 밥의 쌀도 고르라는 문구가 메뉴판 첫 장에 큼직하게 쓰여 있다. 백미로는 ‘백진주’와 ‘호품’, 현미는 ‘진상’과 토종 현미 품종인 ‘북흑조’ 중 원하는 쌀을 고르면 그제서야 주방에서 1인용 미니 밥솥에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맛을 위해 도정기도 물론 구비했다.
귀한 밥을 더 맛있게
밥상머리에서 반찬 투정은 할 수 있어도 밥투정은 불경했다. 한식의 주식인 쌀은 귀했고 언제나 부족했기에 마냥 감사히 여겨야만 할 귀한 식량이었다. 악명 높은 밥맛의 ‘통일벼’를 국가가 나서서 장려한 때도 있었다.
시절이 바뀌었다. 요즘은 국가가 나서 수확량이 적은 품종을 키우라 장려하는 시절이다. 쌀 농사는 이어 가야 하는데, 쌀 소비는 절벽을 맞이했다. 식문화도 입맛도 다변화하면서 더 이상 쌀밥은 독보적인 주식, 즉시 에너지로 전환되는 탄수화물 공급원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됐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던 말은 이제 “밥이 없으면 OO를 먹으면 되지”로 치환됐다. OO 자리엔 빵, 파스타, 쌀국수… 무엇이든 들어간다.
계속 밥을 먹고자 하는 이들의 건강한 밥투정이다. 밥이 귀함을 알기에, 더욱 귀하게 먹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식당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축축한 물기에 퀴퀴한 냄새까지 머금은 밥을 거부하고, 가장 좋은 상태로 도정해 가장 맛있는 때에 가장 맛있게 밥을 지어 먹고자 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에게 ‘임금님표 이천쌀’이 쌀의 브랜드 시대를 열었다면, ‘고시히카리’ 쌀은 혼합미 시대를 넘어 쌀의 품종을 인지하게 했다. 최근엔 ‘추청’ ‘히토메보레’ ‘호품’ ‘오대’ ‘삼광’ 등 뛰어난 밥맛을 내는 쌀 품종을 소비자들이 일일이 외워가며 탐색하기도 한다.
1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 그린하우스에 요리사들이 모여 맛있다고 정평이 난 쌀을 모아 밥맛을 비교해 봤다. 1인용 솥밥을 비롯해 같은 조건으로 밥을 지을 수 있는 취사도구를 넉넉하게 보유한 곳이라 특별히 요청해 장소를 빌려 사용했다. 시식자로는 한식 레스토랑 ‘두레유’ 유현수 셰프, ‘주옥’ 신창호 셰프, 프렌치 레스토랑 ‘프렙’ 이영라 셰프가 참여했다. 국립식량과학원에서 각각 육종과 가공을 연구 중인 정지웅, 한상익 연구관, 그리고 쿠킹라이브러리의 김미영 수석 셰프가 동석해 쌀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쌀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요리사들이 만나면 어떤 대화를 할까. 가장 큰 화두는 쌀의 다양성이었다. 한식, 프렌치, 일식 등 다방면에서 두루 경험을 가진 셰프들은 밥 이외 다양한 요리에 적합한 더 다양한 종류의 쌀이 필요하던 차였다. 초밥에 쓸 쌀과 볶음밥에 쓸 쌀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서양요리의 단골 메뉴인 ‘리조토’용 쌀에 대한 요구는 특히 높았다. 아보리오 같은 리소토에 적합한 품종의 쌀은 따로 있는데, 수입도 쉽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기도 어렵다는 것. 요리사들의 이런 요구에 대한 답은 이미 준비돼 있다. 정 연구관은 “수요가 있다면, 시장이 원하는 특징대로 쌀 품종을 육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문제는 다양성일 뿐, 밥맛은 ‘이상무’다. 시식을 통해 경험한 바, 한국의 쌀 육종 연구는 밥쌀 분야에서는 일본 부럽지 않은 밥맛을 내는 쌀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식한 쌀은 주요 재배 품종 중 최고품질로 꼽히는 것 중 7가지인 ‘신동진’ ‘추청’ ‘오대’ ‘삼광’ ‘호품’ ‘하이아미’ ‘영호진미’를 준비했다. 여기에 인기 품종으로 친숙한 밥맛을 내는 ‘고시히카리’와 통일벼 개량종인 ‘팔방미’까지 모두 9가지를 블라인드 테이스팅했다. 목적은 각각의 쌀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가려 보는 것이었다.
‘밥맛’이야 거기서 거기다. 조금씩 특성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거기서 취향이 갈린다. 어느 정도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품종들 사이에선 대동소이한 개성 차이가 보일 뿐이라는 것이 요리사들이 낸 결론이었다. 집집마다 원하는 밥맛이 다르다고 할 때, 대부분의 소비자가 가려 보는 것 또한 찰기나 질감에 대한 취향이 우선시된다. 유현수 셰프는 “밥의 질감은 물 조절을 통해 1차적으로 가능하다”고 명쾌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물의 양, 불리기 방법, 조리 등 모두 같은 조건으로 조리한 8종류의 쌀밥(고시히카리는 다른 쌀에 비해 짧은 시간 불리고 신동진은 물의 양을 적게 함) 중 찰기가 가장 많다고 셰프들이 꼽은 쌀은 영호진미였다. 가장 고들고들한 질감이라고 평가한 것은 호품이었고, 질감이 부드럽다고 꼽은 것은 오대였다. 단맛, 고소한 맛 등 이상적인 밥맛을 갖췄다고 꼽은 것은 영호진미와 고시히카리, 오대였다. 식욕을 돋우는 밥 향기에서 가장 많은 호감도를 보인 쌀은 고시히카리와 신동진, 오대로 나타났다. 갓 지은 밥 상태에서 가장 높은 총점을 받은 것은 오대, 고시히카리, 추청 순이었다.
밥만 먹고 사는 사람은 없다. 쌀과 잘 어울리는 반찬의 맛, 또는 부식의 스타일도 따로 있을까. 이영라 셰프는 국, 찌개 등 국물류와 먹기에 좋은 쌀로 신동진과 추청을 꼽았다. 신창호 셰프는 덮밥이나 비빔밥 등 수분이 더해지는 부식에 비벼 먹는 형태의 밥에 적합한 것으로 호품을 골랐다.
리조토에 맞는 새 한국 쌀 품종, 한가루
“‘한가루’ 쌀은 원래 쌀가루용으로 개발한 것인데 리조토용으로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왔다”는 한상익 연구관의 말에, 리조토를 만들어 봤다. ‘쿠촐로’ ‘마렘마’ 등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잇따라 낸 김지운 셰프와 볼피노 셰프들이 한국 쌀로 리조토를 조리해 맛봤다. 결론은 “OK”였다. 이탈리아산 아보리오 쌀과 비교해 리조토를 만들었는데, 셰프들로부터 “아보리오와는 조금 다르지만 리조토에 잘 맞는 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완성된 리조토를 씹었을 때 입 안에서 사라지듯 풀어지는 아보리오와 달리, 약간의 찰기가 뭉쳐 입 안에 남는 것이 결정적 차이였다. 김지운 셰프는 “아보리오는 이국적인 맛이라면, 한가루는 아보리오에 비해 크기가 작고, 한국 쌀다운 면모를 간직한 리조토용 쌀이라 할 수 있다”며 “아보리오보다 단가가 낮고, 안정적으로 공급이 가능하다면 이탤리언 요리사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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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객원기자·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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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맛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