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열 페이스대 석좌교수
얼마 전 작은 손녀가 핼로윈 카스튬(의상)을 입은 사진을 큰딸이 뉴욕에 있는 필자에게 보내왔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손주들과 자식들 집안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도 사진과 비디오를 곁들인 텍스트로 늙은 아버지에게 보내주는 자상한 딸들이 있어 노년이 즐겁다. 강의가 있는 바쁜 날을 빼고는 갤러리 보는 재미로 세상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세상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어서 좋다.
그런데 올해 작은 손녀 딸이 동네 친구와 같이 입은 카스튬이 동네가게에서 파는 것이 아니고 누가 보아도 분명히 집에서 만든 스시 모양이었다. 간장과 와사비까지 붙은 스시 속에 아이들이 밥이 되어 들어있는 모양인데, 색깔도 모양도 너무도 예뻐서 아이들도 그걸 아니까 너무도 보기에 즐거워 보인다.
딸에게 물으니 손녀 딸 동네친구 아버지가 자기 딸과 친한 친구 것까지 둘을 집에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느질을 그렇게 잘하는 아버지도 있구나 했는데, 그 아버지 직업이 외과의사라 칼로 자르고 꿰매고 하는 데는 이력이 난 터라 쉽게 했으리라는 얘기였다.
그걸 보고 필자는 한참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요즘은 아버지 노릇하기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에다가, 이곳 뉴욕에서 요즈음 젊은 아버지들을 보고 느낀 것들이 세월과 세상 변하는 것을 함께 실감하게 해주는 터였다.
요즘의 아버지들은 옛날의 아버지처럼 했다가는 집에서 쫓겨나기 십상일 정도로 너무나 잘한다. 요즘 전국 어디에서나 골프장들에 젊은이들이 안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하루 종일 골프장에 가있으면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 소리 듣기는 어렵다. 젊은 아버지들은 골프를 통한 사교보다는 가정의 행복을 택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옛날의 우리 세대는 그래도 그 전 시대 봉건사회의 가부장적인 생각의 아버지 세대보다는 자식들을 생각하고 열심이 산다고 자부하던 날들이 있었다.
필자는 만 17세에 대학 1학년이 될 만큼 학교를 일찍 들어가게 되었는데, 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집에서 어른들 성가시게 구는 아이니까 나이가 안 되어도 어떻게 교사로 계시던 누님들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막무가내로 요즘 말로 데이케어 보내듯이 ‘덤프(dump)’를 당한 것이었다. 시골학교 첫 시험에서 74점을 받았다는데 (우리 집에서 전설 같은 얘기로 내려오는 영광을 가진 셈이다) 그런 것에 상관할 어른들이 아니었다. 행여나 학교 싫어해서 안 간다면 큰일이니까 괜찮다, 괜찮다 그러시곤 그냥 아침시간이면 없어지는 재미로 아이를 밀어낸 셈이었다.
필자만 그러했겠는가. 한국에서의 우리 전 시대는 자식은 그냥 밥만 먹여놓으면 크는 걸로 알고 키울 때였다. 우리나라의 문화 속에서는 나이가 많은 이들이 왕이었다. 어린이들은 말도 잘 못하고 “버릇없이 굴면” 안 좋으니까 얌전히 있는 게 으뜸가는 어린이들의 덕목이었다. 그런 세월에 비하면, 요즈음의 어린이들은 자기들이 왕이다. 그러니 우리 세대는 어려서는 어른들에 눌려 지내고, 나이 들어서는 어린이들에게 밀려서 집에서 이사를 할 때 서울에 있는 할아버지들은 집안 서열이 거의 모든 집안에서 강아지 다음이 되어버렸다지 않은가.
우리 세대에서는 직장의 상사가 저녁회식 얘기를 꺼내면 사전에 다른 무슨 개인적 가정적 계획이 있더라도 우리는 밝은 얼굴로 즐거워하는 모양새로 상사의 뜻에 따랐다. 다른 곳은 전화를 걸어 이렇게 되었다고 얘기를 하면 그것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상사들이 부하들의 형편을 모르고 우겼다가는 후환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세월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바뀐 문화는 너무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요즘의 아버지들이 힘들겠지만, 또 서로 아버지들 간에 경쟁이 붙어서 스트레스도 심하겠지만, 이렇게 가정을 챙기는 아버지들은 늙어서 가정 내에서의 서열이 강아지 다음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식생활에서 아내가 없이는 밥도 못 챙겨먹는 못난 전 세대의 아버지들보다는 요즘 아버지들의 노년이 훨씬 행복하고 독립적인 면이 강해질 것이다.
힘들게 살고 있는 요즘의 젊은 아버지들이여, 당신들에게 하늘의 은총이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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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열 페이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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