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청원 내과전문의
사람의 삶에 깊숙이 관계된 일을 하는 의사, 교사, 종교인들에겐 다양한 인간의 삶을 대면할 기회가 비교적 많다. 감정의 색채와 행위의 방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의사로서는 그들의 각기 다른 마음을 얻는 것이 쉽지 않고 그로 인한 보람을 갖는 것도 쉽지 않다. 나 역시 개업의로서 ‘인술’이라는 것을 어질 인(仁)의 인술이라기보다는 사람 인(人)의 인술로 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저 직업윤리에 준해서 환자를 대해온 것이다. 의술을 제공한 만큼 보수(진료비)를 받았다. 환자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베풀거나 희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내 직업의 보람과 만족은 많이 희석된다. 그러나 가끔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일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의술을 제공할 때다.
지난해 우리 교회의 페루 의료선교에 소아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북가주에서 내려와 동참해준 착한 소아과 의사가 있었다. 그와 한 방에서 일주일간 지내는 동안 그의 취침 중 코고는 형태가 전형적인 수면무호흡증(Sleep apnea)이라는 것을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는 정밀검진을 곧 받으라는 나의 조언에 즉시 병원에서 확진을 받고 잘 때마다 호흡보조기를 착용한 후 편안한 수면이 가능해지고 급사의 위험을 면하게 되었다.
생활 속의 의술이 결코 타인을 위하여 일방적으로 준 것만은 아니었다. 대가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보너스를 받는 경우가 있다.
금년 여름 할리웃 보울의 ‘밥 말리 기념 콘서트’에 갔었다. 레게음악의 대가로 마리화나 애연가인 그의 팬들이 모인 자리답게 여기저기서 피워 대는 마리화나 연기냄새가 역겨웠다. 앞좌석에서 맹렬히 마리화나를 피워대던 40대의 관객 한 명이 갑자기 쓰러졌다. 주변은 놀란 관객들과 안내원 등으로 소란스러워졌고 나는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그에게로 좌석을 건너 뛰어 넘어 갔다. 의학적으로 마리화나는 졸도나 심장마비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누워 있는 그의 맥박과 호흡이 정상인 것을 확인한 후 일행으로 부터 그가 당뇨병 환자임을 듣고 주위에 당분이 포함된 음료수가 있으면 건네 달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당분을 공급 받은 그는 잠시 후 의식을 되찾아 벌떡 일어났고 주위 관객들은 환호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모험의 의료 행위였지만 저혈당으로 인한 뇌손상은 면했다. 얼마 후 도착한 응급구조대원들이 그를 병원으로 후송하려는 것을 내가 내과 의사라고 밝히고 상태가 계속 호전 될 것이고 내가 돌봐 줄 터이니 그가 콘서트를 계속 즐기게 후송하지 말도록 했다.
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이 할리웃 보울의 관객들로 부터 박수를 받는 경우를 상상조차 해볼 수 있을까? 내 의술로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흐뭇함을 느꼈던 순간이다.
일전 고등학교 다섯 동창 부부들이 칸쿤으로 여행을 갔다. 한국에서 온 동창 한 명이 물놀이 중 숨이 차고 얼굴이 파래지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는 보지 못 했던 심폐기능의 부족함을 관찰한 순간이었다. 한국에 돌아간 그에게 즉시 세브란스 병원 외래 책임자로 있는 동창에게 소개하여 심장전문의에게 심장부하 검사를 받도록 했다. 검사 중 그에게 심장마비가 왔지만 즉시 심폐소생 시술 후 곧바로 심장의 막힌 혈관을 뚫는 수술을 받았다. 심장이나 뇌의 손상 없이 회복한 그는 지금도 왕성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유명한 기타 제조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퇴원하며 병원에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감사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그에게서 사람의 냄새가 풍겨난다. 내게까지 특별히 제작한 고가의 기타를 소포로 보내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보너스다. 함께 여행했던 다섯 부부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전국 맛 자랑 여행도 시켜주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접하며 때로 환자와의 관계에서 실망과 어려움도 겪지만 간혹 이처럼 삶의 보너스 같은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의 의미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의술이 내게 있음을 이 감사의 계절에 새삼 감사드리게 된다.
<
최청원 내과전문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