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축보다 현재 삶 충실, 나 위해 지갑 열고
▶ 혼밥 혼술서 혼영 혼행까지 프리미엄급으로
# 혼자 사는 40대 초반 직장여성 윤모씨는 앞이 보이지 않는 불경기의 먹구름 속에서 더 이상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마음을 먹었다. 여름이면 패키지보다는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 짐을 싸서 떠났고, 겨울이면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일본이나 캐나다를 가서 보드를 타고 왔다.
그는 “저축을 10만원 더 한다고 해서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물가는 계속 올라 돈의 가치는 떨어지니 지금 당장 즐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라며 “저지르고 난 뒤 후회하는 것과 시도조차 못하고 후회하는 것 중 요즘 사람들은 전자를 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발적으로 혼자인 소비생활을 즐기는 ‘얼로너(aloner)’가 대한민국의 ‘혼더스트리(혼자+인더스트리)’라는 새로운 경제학을 쓰며 소비 지도를 바꾸고 있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갇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장밋빛 내일에 대한 환상을 갖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내가 당장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 지갑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주어진 환경이나 경제적 수준에 맞춰 정해진 라이프스타일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를 위해 순순히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악착같이 사는 것이 무의미하며 즉각적인 욕구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책상 위 나만의 럭셔리한 공간을 위해 루이비통 필통을 사는가 하면 월세로 살면서도 수입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이들도 생겨났다.
◇한 끼를 먹어도 프리미엄을 원한다=실제로 어느 때보다 ‘나’에 집중된 시대에 온갖 현재 지향적 삶을 반영한 산업군이 발달하며 이들을 지원하는 시장이 갈수록 진화되고 있다. 특히 중요한 먹거리 시장이 크게 변했다. 혼자 집에서 밥을 먹어도 제대로 차려놓고 좋은 음식을 먹겠다는 욕구가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편의점 도시락은 뒤돌아서면 다시 배고픈 과거의 엉성한 도시락에서 발전돼 셰프나 호텔들과 컬래버레이션한 차별화된 제품을 쏟아내며 제대로 먹는 혼밥 열풍에 가세했다.
지난해 CU에서 판매한 3,000여종의 취급 품목(담배 제외) 중 ‘백종원 한판도시락’이 매출 1위를 달렸고, ‘백종원 매콤불고기정식’과 ‘백종원 맛있닭가슴살’이 각각 3위와 8위를 기록했다. GS25의 경우 ‘김혜자 바싹불고기 도시락’은 매출 3위, 세븐일레븐은 ‘혜리 11찬 도시락’이 10위에 올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편의점업체는 이를 겨냥한 신상품 출시 및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부적으로 CU는 2015년 조리·소스 전문가 등으로 구성한 ‘상품연구소’를 열고 PB제품을 선보였다. 특히 쌀밥 전문가인 ‘밥소믈리에’가 제품에 들어 있는 쌀밥을 만들었고, 세븐일레븐은 도정 당일 입고된 쌀을 3일 이내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식품 업계의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CJ제일제당(097950) ‘비비고 가정간편식’은 지난해 6월 출시 후 8개월 만에 누적 매출 150억원을 달성했다. 첫 달 10억원 남짓 매출에서 지난 1월에만 4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비비고 육개장은 단일 제품만으로 월 매출 10억원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신세계푸드 올반은 최근 부진한 한식뷔페 매장을 베이스캠프로 활용하고 사업 중심을 가정간편식(HMR)으로 재편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해에만 9월부터 60종의 HMR 제품을 출시해 1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200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라면은 단순히 대충 끼니 때우는 용도가 아니라 진정한 한 끼 대용으로 성장했다. 2015년 농심(004370) ‘짜왕’과 오뚜기 ‘진짬뽕’ 등이 프리미엄 라면 돌풍을 일으키자 후발주자들이 잇따라 프리미엄 대열에 합류했다.
라면 한 끼를 먹어도 ‘프리미엄’을 얹은 것이다.
집에서 혼자 밥을 해 먹거나 혼자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CJ제일제당은 캠핑용 ‘백설 간편 요리양념장 파우치’도 내놓았다.
대상은 지난해 9월 ‘바베큐 간장양념’과 ‘바베큐 칠리양념’ 등 업계 최초 서양식 고기양념장도 출시했는데 과거 집에서 밥을 안 해먹어 정체하던 양념장 시장은 새롭게 고개를 들어 성장세로 돌아섰다.
◇그릇세트도 4인 가구에서 1인 기준으로 변화=이런 시장의 변화에 따라 4인 가구 기준이었던 그릇세트도 1인용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가전제품도 디자인을 강조한 1인용 제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국도자기는 올해 신제품으로 혼자 사용하기에 알맞은 ‘므아레’ 가정식 차림세트와 ‘피딕스’ 등을 출시했다. 므아레는 낱개 구매가 가능해 개인이 필요한 수량만큼 골라서 구성할 수 있다. 피딕스의 1인용 세트는 공기와 대접 각 1개에 접시 두 개와 머그잔으로 구성돼 혼자서도 잘 차린 밥상을 즐길 수 있다.
갤러리아명품관에서는 소형 가전이 싱글족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1인 전기밥솥과 1인 토스터기, 찜이나 그릴 요리를 두루 할 수 있는 멀티찜기를 비롯해 10여 상품을 판매 중인 ‘레꼴뜨’는 지난해 대비 매출이 17% 증가했다.
혼밥족이 자주 찾는 편의점에서는 달라지는 1인 가구의 입맛을 붙잡기 위해 차별화된 간편식을 제공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스스로 요리 하는 혼밥족도 늘면서 1인용 재료를 키트형식으로 만들어 파는 곳도 많다.
옥션은 올리브TV와 손잡고 올리브TV프로그램 ‘오늘 뭐 먹지?’에서 나온 레시피에 맞게 식재료를 넣은 ‘쿠킹박스’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소금이나 고춧가루 같은 양념부터 양파나 파 같은 채소까지 딱 필요한 만큼만 넣어 집에 재료가 하나도 없어도 요리를 간편하게 할 수 있다.
◇주방·식기, 2030세대가 큰 손으로 부상=바쁜 일상과 스트레스에 지친 사람들은 혼자 쉴 수 있는 성찰의 공간인 집을 위한 투자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인테리어 및 생활소품 시장 규모는 12조5,000억원으로 2008년(7조원)에 비해 70% 이상 커졌다.
롯데백화점은 최근 6개월 동안 주방·식기 상품군에서 20~30대 고객들의 매출이 20% 이상 증가하는 등 40~50대 주부들의 전유물이었던 주방·식기 상품군에서 젊은 고객들이 큰 손으로 부상했다고 전했다.
특히 20~30대는 40~50대보다 객단가는 낮지만 방문빈도가 높다. 지난해 주방·식기 상품군의 20~30대 매출 구성비는 지지난해보다 10%포인트 늘었고 셀프 인테리어 열풍이 가속화되면서 독특한 디자인의 가성비가 높은 리빙 SPA(생산유통일괄) 브랜드들이 주목받고 있다.
실제 롯데백화점의 지난해 주방·식기 상품군의 매출은 3.7% 늘었지만, 신제품 회전율이 빠른 리빙 SPA 브랜드들의 매출은 같은 기간 대비 25.2% 늘면서 주방·식기 상품군 전체 매출 신장률보다 20%포인트 이상 높았다.
이 같은 시장 변화에 맞춰 지난해만 해도 플라잉타이거 코펜하겐이나 미니소, 올라카일리 등 다양한 리빙 관련 브랜드들이 무더기로 론칭하기도 했다.
자라와 스웨덴의 H&M은 일찌감치 리빙 SPA 매장을 내며 홈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한국 소비자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이미 에르메스·펜디 등이 라이프스타일·리빙 제품으로 한국에서 입지를 공고히 한 데 이어 크리스찬디올은 지난달 처음 쿠션류·식기 등과 같은 리빙 제품을 선보이며 이 같은 트렌드에 합류했다.
패션은 가장 유행 없는 시대에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게 유행이 됐다. 자신의 개성을 반영한 패션이 대세로 레트로 열풍, 스트리트 패션, 플라워 패션, 미니멀리즘 등 역대 가장 모든 트렌드가 혼재하고 있다.
과거 트렌드에 휩쓸렸던 패션 피플들은 나만의 패션을 중시하며 이제 명품과 스트리트 패션을 섞어서 연출하는 것이 또 다른 트렌드가 된 것이다. 혼자 쇼핑하는 사람들을 위해 패션업계에서는 단품을 팔기보다는 코디를 강화해 세트 상품을 적극 선보이기 시작했다.
세정그룹 관계자는 “나 홀로 쇼핑족들은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동행자가 없기 때문에 제품을 맞춰 입을 수 있도록 매장 직원이 직접 알려주는 코디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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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정·박윤선·이지윤·윤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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