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은 왜 이렇게 길까요? 울고 싶은 밤, 누구의 노래를 듣고 싶은 밤이외다....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달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의 장식을 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어 버려야겠다.”
수필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이다.
소설가 이광수, 시인 정비석, 평론가 이어령 등 한국의 저명한 문인들도 가을을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로 묘사했다. 사방에 곡식이 차고 넘치고 나무마다 각종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리며 분명 풍요로운 계절인데도 왜 이들에게 가을은 애처롭고 안타까운 계절이 되었을까.
그 당시 사회상이 몹시 어둡고 어지러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의 가을도 아름답고 넉넉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그때처럼 몹시 두렵고 어두운 계절로 다가온다.
우리는 지난달 1일 58명이 무참하게 숨진 라스베가스 총기참극에 이어 한 달 만에 또 8명이 사망한 맨해턴 트럭돌진 테러참사의 충격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다. 그 때문에 지난 주말 열린 뉴욕마라톤 행사가 무사히 잘 끝나기를 모두가 바랐었다.
다행히 경찰의 저격수 배치, 트럭 방호벽 설치, 폭발물 탐지견 동원 등 철통같은 경계 속에 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루 만에 또다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의 충격으로 우리는 더 극심한 악몽에 빠져들었다. 텍사스 주 조그마한 마을의 한 교회에서 예배 도중 한 백인남성이 총기를 난사해 26명이 숨지고 20명이 부상당하는 텍사스 주 최악의 참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끔찍한 테러, 총기난사 사건이 번갈아 일어나며 미국의 가을은 온통 붉은 핏빛으로 물들여지고 있다. 마치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이제 총기참사는 하루가 멀게 들풀처럼 번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의 깨진 유리창 이론은 하나의 깨진 유리창을 방치해두면 같은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논리로, 미국은 지금 총기를 제대로 규제 못해 도처에서 총격사건이 무차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주민이 불과 300여 명밖에 안 되는 마을에서 이번 참사로 목숨을 잃은 26명 중에는 일가족 8명을 포함, 18개월 영아, 14세 소녀, 노인, 임산부도 들어 있다. 이런 참담한 비극에도 미국의 정치인들은 항상 입으로만 유감을 표할 뿐, 확실한 대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태생적 총기문화 때문에 라고 하는 변명도 이제는 하도 들어 신물이 난다.
연방질병예방통제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총기로 인한 사망자가 인구 10만 명당 12명이다. 구체적으로 2014년 한해 3만3,500명이던 총기 사망자가 2015년에는 3만6,000명, 지난해에는 3만8,000명으로 계속 늘고 있다. 그럼에도 특단의 대책이 없어 애꿎은 시민만 목숨을 잃고 있다.
이제 어디 가서 살아야 안전할까? 대도시는 항시 테러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고, 그렇다고 조용한 외곽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고... 이래저래 목숨이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는, 그야말로 안전한 곳이 없는 미국이 되었다.
그런데도 미국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순방길에 접한 이번 총기참사를 “악마의 소행”이라고 규탄했다. 악마의 짓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제발 말로만 말고 더 이상 악마가 나오지 못하도록 실질적인 규제방안 마련에 앞장서야 한다. 트럼프는 한 땀 한 땀 성실하게 노력하며 사는 수많은 국민들의 삶을 더 이상 부질없게 만들지 말라. 적어도 나라의 지도자라면 국민들이 언젠가 개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트럼프는 지금 지지율이 역대 최하를 달리고 있다. 총기규제에 앞장선다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할까? 어제 총기참사에서 죽은 사람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오늘, 현실에 무조건 감사하며 최대한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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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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