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노스 캐스케이드 산행길에 들른 그로서리의 주인이 동포여서 반가웠다. 레이니어 산간업소에 들렀을 땐 주인이 한국일보를 읽고 있어 더 반가웠다. 캐나다국경 과수원 마을 오캐노건에서 몇 년간 그로서리를 한 동료 교인도 있다. 매출은 많지 않아도 경쟁이 없고 범죄위험도 적어 장사할 만 하다고 했다. ‘한인업소 무소부재’라는 말이 허사가 아니다.
그로서리는 한인 이민자들의 주종 비즈니스다.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상황도 비슷하다. 영어가 서투른데다가 고국의 학력과 직업경력이 통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벽에 부딪혀 곧장 주류사회에 진출하기 어렵다. 유태인, 중국인, 일본인 이민자들도 그로서리에 목을 맸고, 요즘엔 인도, 파키스탄 및 중동국가 이민자들도 그렇다.
그로서리 역사는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설탕·커피·차·조미료 등 식품을 대량으로 판 가게들이다. 그 후 취급식품이 점점 확대돼 농작물(야채·과일)과 낙농식품(우유·치즈·육류 등)은 물론 통조림 따위의 반영구 가공식품도 포함됐다. ‘Grocer’는 도매상을 뜻하는 프랑스어 ‘Grossier’에서 연유했고, 이들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이 그로서리(grocery)로 불렸다.
미국 그로서리의 선조는 서부영화에 곧잘 나오는 ‘거래소(Trading Post)’이다. 개척자들에게 식품은 물론 의류와 일용품, 가구와 공구까지 판 시골구멍가게다. 거래소가 ‘잡화점(General Store)’으로 성장했고, 잡화점이 도시지역에서 그로서리 스토어로 변형됐다. 이들 중 일부는 온갖 식품과 함께 일용잡화, 약국, 심지어 주유소까지 곁들인 슈퍼마켓으로 발전했다.
한인 그로서리협회(KAGRO: Korean American Grocers Association)는 대체로 미국 내 어느 대도시에서나 최대 한인경제단체로 꼽힌다. 그만큼 업소수가 많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들 업소는 규모가 그로서리보다 작은 편의점(convenience store)이다. 대부분 도심지에 몰려 있고 주유소를 겸한 곳이 많다. 1년 365일, 24시간 문을 여는 곳도 있다.
캔디와 과자 등 스낵식품을 비롯해 담배, 커피, 소다수를 주로 팔고 신문, 잡지, 일반약품 등 일용잡화도 진열해 놓는다. 특히 복권판매가 상당한 수입원이다. 캘리포니아, 네바다, 뉴멕시코에선 주류를 팔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 지역의 편의점은 ‘리커 스토어’로 불린다. 한인 편의점 중엔 규모를 더 줄여 담배 제품을 주로 파는 ‘스모크샵(smokshop)’도 많다.
한인운영 편의점 가운데 상당수가 소위 ‘맘 & 팝(Mom & Pop)’ 스토어로 시작했다. 요즘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부부나 가족이 매달린 업소가 많다. 매출과 마진이 상대적으로 높은 빈민층 동네에 가게를 열어 위험부담이 높을 수밖에 없다. 편의점 외에 청소, 페인팅, 가드닝(조경) 같은 맘 & 팝 업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다른 소수민족 업자들에 이양됐다.
이미 한인 그로서리(식품점)도 크게 줄었다. 민병갑 교수(뉴욕 퀸스대학)는 1995년 전국에 2,500여개였던 한인 그로서리가 지금은 1,500개도 안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유대인 그로서리가 그랬듯이 한인 그로서리도 10년 후엔 전멸하거나 극소수만 남을 것 같다고 했다. 한인들의 입맛이 많이 미국화 됐고, 미국 슈퍼마켓들이 아시안 식품도 팔기 때문이란다.
시애틀지역의 한인 편의점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한 중견업자는 몇 년 전까지 1,000여개소를 헤아렸던 KAGRO 회원업소가 900여개 이하로 줄었다고 했다. 요즘도 가게를 팔려는 업주들이 많은데, 사겠다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인도, 파키스탄 또는 중동인이란다. 전기차는 물론 수소차가 쏟아져 나올 터이므로 주유소 영업도 잘해야 10년을 버틸 것이라고 했다.
한인 맘&팝 업소들이 석양을 맞고 있다. 슈퍼마켓, 월마트, 코스트코 등 소위 ‘박스 스토어’와는 가격경쟁이 안 된다. 더 겁나는 건 파죽지세로 소매시장을 장악하는 아마존이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분야의 비즈니스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세계최대 스포츠용품 기업 나이키, 홀푸드 마켓, 벤&제리 아이스크림, 델 컴퓨터도 모두 맘&팝 가게로 출발했었다.
<
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