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4월 16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그 핀란드역에 17년간의 긴 망명 생활을 청산한 한 중년 정치인이 도착한다(러시아는 지금도 열차 도착지가 아니라 출발지 이름을 따 역명을 정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그 사람이다. 이것이 그 후 100년 가까이 전 세계를 흔든 공산주의 혁명의 시작이다.
당시 러시아는 2월 혁명으로 300년간 나라를 지배하던 로마노프가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케렌스키가 이끄는 과도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으나 니콜라이 퇴위의 직접적 원인이 된 제1차 대전 참전을 고집하며 연전연패해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은 도착하자마자 ‘4월 테제’를 발표해 과도 정부에 대한 지지 철회와 군대와 경찰의 폐지, 금융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한다. 그는 7월 봉기를 시도하지만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체포령을 피해 핀란드와 국경 지대의 시골 마을로 가까스로 도주한다. 지금 이곳에는 그가 이 때 살았던 초가집이 ‘레닌의 오두막’이란 이름으로 재현돼 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레닌의 꿈이 물거품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던 이 때 러시아의 장군 코닐로프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다급해진 케렌스키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의 지휘를 받는 소비에트 병사들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한다. 이 때부터 러시아의 실권은 볼셰비키 쪽으로 급속히 기울기 시작한다.
그 해 10월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 레닌은 24일 임시 정부 전복을 지시하며 26일 정부 각료들이 모여 있던 러시아 황제의 ‘겨울 궁전’이 볼셰비키 손에 떨어지면서 10월 혁명은 거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성공한다.
권력을 얻는 과정은 간단했지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러시아 지배 영토를 독일에 대폭 내주는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으로 제1차 대전을 마무리 지은 레닌은 비밀경찰인 체카를 만들어 반정부 인사에 대해서는 재판 없이 체포와 처형, 재산 몰수를 할 수 있다는 포고령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수 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훗날 스탈린이나 히틀러가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최악의 정치 학살극이었다. 그러고도 그 후 3년간 구 왕조를 지지하는 백군과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적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백군 150만, 적군 150만 등 3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와중에 쫓겨난 후 에카테린버그의 한 저택에 연금돼 있던 니콜라이 2세와 그 아내, 1남 4녀 등 일가족 전원이 레닌의 지령으로 사살되고 불태워진 뒤 밀매장됐다. 이들의 시신은 1992년 소련 붕괴 후 발굴돼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한 성당에 안장돼 있다.
1924년 레닌이 53세에 뇌졸증으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스탈린은 대대적인 정적 숙청과 함께 5개년 개발 계획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유럽까지 세력을 늘리는 것은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사회주의로 기우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지금 3대째 공산 왕조를 이어가고 있는 북한도 소련 군화발에 김일성이 묻어왔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한 때 미국 보고 “너희를 매장시키겠다”고 큰 소리쳤던 소련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잘 살게 해주겠다’던 공산주의 구호는 ‘빈곤의 평등’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채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능력과 노력에 관계없이 결과가 같다면 누구도 능력과 노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26일은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월 혁명은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를 전도한 모세스 헤스 말대로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실험이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공산 혁명의 진앙지인 러시아에서조차 요즘은 세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젊은 레닌이 혁명을 모의했던 상트의 혁명 유적지는 이제 기념패 하나 없는 평범한 사무실로 변했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가야 겨우 박제된 채 누워 있는 레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레닌은 자신의 명령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는데 대한 비판이 일자 “달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누군가 “오믈렛은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0월 혁명 100주년을 맞아 오믈렛의 행방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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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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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래서 남로당에서 전향한 박씨 부녀를 적극 찬양하셨구먼....